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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쟁/이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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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정규운동을 생각한다

 

지칠 수 없는 아사히 투쟁!

오수일 (금속노조 아사히비정규직지회 부지회장)

 

 

“아사히글라스는 23명을 직접고용하라!”

 

지난 8월 23일, 근로자지위확인 소송 1심 선고 결과가 나왔다. 당연한 결과이지만 그 순간만큼은 꿈이라면 깨지 말기를 바랐다. “아사히글라스는 23명을 직접고용하라!”, 짧은 이 문구를 얻어내기 위해 4년이 넘는 긴 시간이 걸렸다. 기쁨과 분노가 함께 치밀어 올랐다. 법의 판결에 연연하지 않기로 했지만 기대와 간절한 바람은 감출 수가 없었다. 2017년 8월에 대구지방검찰청 앞에서 “아사히글라스를 기소하라!” 외치며 6개월간 천막농성을 했다. 아사히비정규직지회가 고소한 불법파견 사건을 2년이 넘도록 처리하지 않고 있는 검찰을 가만히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2017년 9월에 고용노동부 구미지청은 아사히글라스 불법파견을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다. “아사히글라스는 178명을 직접고용하라”는 시정 명령도 내렸다. 이를 무시한 아사히글라스에 과태료 17억 8천만 원까지 부과했다. 그러나 아사히글라스는 행정소송에 들어갔다. 또 더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릴 지는 아무도 모른다.

 

고용노동부가 넘긴 불법파견 사건을 넘겨받은 김천지청 김도형 검사는 2017년 12월 22일 제대로 된 수사 한 번 없이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5천 페이지가 넘는 고용노동부의 증거자료도 김도형 검사에겐 휴지조각에 불과했다.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너무 화가 났다. 매일 아침 검찰청 로비 현관 앞으로 갔다. 출근하는 대구지검장과의 만남을 시도했다. 그들은 우리를 폭력집단으로 간주했다. 며칠째 계속되는 면담 투쟁에 대구지검장은 우리를 피해 쪽문으로 출근하는 부끄러운 꼴을 보였다. 콧대 높은 검찰의 권위도 땅 속으로 꺼지는 듯했다. 검찰의 무혐의 처분에 맞서 항소를 했고 담당검사 김도형을 직권남용으로 고소했다. 담당검사의 고소 건은 아니나 다를까 기각되었다. 검찰 조직의 제 식구 감싸기였다.

 

 

투쟁으로 쟁취한 검찰의 재기수사명령

 

2018년 5월 14일, 대구고검은 김천지청에 재기수사명령을 내렸다. 기뻤지만 의구심도 들었다. 그동안 검찰의 행태를 지켜봤기 때문이다. 그 후 강도 있는 수사가 진행됐지만 시간은 예상보다 많이 늦어지고 있었다. 담당검사는 “10월 초 수사는 종결됐다. 상부의 결재를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윗선에 결재가 올라갔다고 하고도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 그대로 시간이 멈춘 듯했다. 억울하게 해고된 노동자들이 길거리에서 수년째 고통 받고 있지만 검찰은 시간 끌기로 나왔다.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2018년 12월 27일, 대구검찰청에 기소를 촉구하려고 지검장 면담을 요구했다. 이미 수사는 끝났음에도 시간을 끌고 있는 이유를 지검장에게 꼭 들어야만 했다. 지검장 면담은 단칼에 거절됐다. 그렇다고 물러설 우리도 아니었다. 로비로 들어간 11명은 곧바로 연좌농성에 돌입했다. 6시간이 넘게 연좌농성은 이어졌다. 검찰의 불법행위는 법으로 보호 받고 있었다. 경찰들은 우리를 연행하기 위해 포위했다. 대구지방검찰청 로비 앞 정문에서는 많은 연대동지들이 경찰과 몸싸움을 하고 있었다. 11명 전원이 연행됐다. 그러나 모두 연행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우리는 정당하기에 당당할 수 있었다. 한 달 뒤 대검찰청 수사심의위원회가 열렸다. 검찰은 책임을 회피하려는 듯 수사심의위원회로 사건을 넘겨 버린 것이다. 결국 수사심의위원회는 아사히글라스를 불법파견으로 기소하라고 권고했다. 무소불위의 권력 검찰을 상대로 겁 없이 투쟁한 결과였다.

 

우리는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갈 곳 없는 비정규직이기에 잃을 것도 겁날 것도 없었다. 이런 투쟁들이 형사사건(불법파견) 기소와 민사 1심(근로자지위확인 소송) 승소라는 결과를 만들어냈다고 생각한다. 대구검찰청 연좌농성으로 재판이 진행 중이다. 1심에서 벌금 200만 원과 100만 원씩이 각각 선고됐다. 검사는 나와 남기웅 수석부지회장 두 명에 대해 항소했다. 재판은 아직 진행 중이다.

 

 

뜨거운 여름, 5차 일본 원정투쟁

 

2019년 9월 2일, 5차 일본 원정투쟁을 갔다. 반일 감정으로 불매운동이 확대되는 심각한 분위기였다. 언론은 온통 한일 관계를 악화시키는 보도로 도배되고 있었다. 불편한 한일 관계 속에서 일본 원정투쟁에 나서는 마음이 가볍지만은 않았다. 5차 원정투쟁의 취지는 우선은 민족주의와 제국주의를 선동하는 양국의 정부를 규탄하고, 국가를 넘어 노동자는 하나로 뭉치고 연대를 강화하자는 것이었다. 다음으로는 아사히글라스 본사에 한국 행정부와 사법부의 판결을 존중하고, 이 사태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서기를 촉구하기 위함이었다.

 

아사히비정규직지회의 일본 원정투쟁은 2015년 구미 KEC지회의 소개로, 일본 철도노조인 도로치바노조와 만나며 인연이 시작됐다. 도로치바노조는 그동안의 일본 원정투쟁에 아낌없이 지원했다. 그 도움으로 일본 아사히글라스 본사를 타격할 수 있었다. 국적은 달라도 일본 동지들은 적극적이었다. ‘아사히비정규직지회 지원공투회의’(이하 지원공투회의)라는 단체를 스스로 만들었다. 지원공투회의는 도로치바노조를 중심으로 여러 노조들과 사회단체로 구성되어 있다. 한 달에 한 번씩은 일본 아사히글라스 본사 앞에서 피켓을 들고 선전지를 돌리는 등 많은 활동을 하고 있다. 투쟁의 주체가 없어도 지원공투회의 동지들은 아사히글라스 본사를 압박했다. 아사히비정규직지회의 <들꽃, 공단에 피다>라는 책을 일본어로 번역해 일본 노동자들에게 널리 알리고도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대다수가 고령의 연세임에도 노동조합의 중요성과 노동자라는 자부심은 대단해 보였다. 아사히글라스 본사에 항의서를 전달하러 갔다. 두 시간 동안 아사히글라스 본사 담당자와 긴 언쟁을 벌였다. 긴 신경전이 끝나고 의장님이 말씀하셨다. “법으로 이겨서 그런지 태도가 달라졌다. 4차 원정투쟁 때보다 공손해졌고 원론적이지만 인정하고 있다”고 하셨다. 4차 때까지 아사히글라스는 “본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일관되게 주장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한국에서 법적 대응을 잘 처리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이렇다 저렇다 말할 수 없다”고 했다. 언쟁이 끝나고 본사 건물 입구에서 곧바로 선전전을 시작했다. 세 시간 가까이 발언과 함께 선전전이 진행되었다. 60대~80대의 고령임에도 일본 동지들의 기세와 의지는 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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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차 일본 원정투쟁에 함께한 동지들 [출처: 지회]

 

 

‘No Japan’이 아니라, 한일 노동자 국제연대

 

일정을 마치고 식사를 하며 하루 활동을 평가하는 시간을 가졌다. 일본 노동운동의 역사를 들을 수 있었다. 철도 민영화로 인한 일본 노동운동의 뼈아픈 과거를 듣게 되었다. 민영화가 국가 경제에 끼치는 영향이 얼마나 심각한지 느낄 수 있었다. “아사히비정규직지회는 거대한 자본과 정부를 상대로 신자유주의에 맞서 싸우고 있다. 우리도 그렇다. 일본 정부가 노동자를 상대로 크나큰 공격을 했었다. 그때 많은 노조가 없어지고 축소되었지만 우리는 계급적 노동운동으로 아직 정부와 자본에 맞서 싸우고 있다”고 야마모토 히로유키 의장님이 말씀하셨다. 그리고 “일본 AGC(Asahi Glass Co., Ltd)에서 노동자를 조직해야겠다는 희망을 갖고 있다”라고 덧붙였다. 국가의 경계를 넘는 노동자 계급운동에 대해 잠시 생각하게 되었다.

 

이른 아침부터 전철을 타고 한 시간 반을 달려 AGC 게이힌 공장에 도착했다. AGC 게이힌 공장도 상당수가 비정규직이라고 했다. 출근하는 노동자들의 얼굴에서 고단한 삶을 느낄 수 있었다. 지원공투회의 가마타 요시코 사무국차장은 “일본 노동조합이 큰 패배를 겪고 난 후 노동자들은 패배의식으로 노동조합을 멀리 한다”고 전했다. 일본 동지들은 한국의 민주노총 100만 조합원을 부러워했다. “일본에서는 소수의 조합원으로 노동조합 활동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 조직 확대가 최우선 과제다. 그러나 쉽지 않다”며 답답함을 표했다. 우리와 함께하기 위해 2시간이 넘게 전철을 타고 오시는 동지들도 있었다. ‘스즈키 레미콘노조투쟁지원 연대공투회의’ 하나와 후지오 대표도 함께했다. 84세의 연세에 일본 노동조합의 재건을 위해 활동하신다고 하셨다. 모든 분들이 일본 노동운동의 주체이시고 역사였다.

 

일본 원정투쟁은 무더운 여름 도쿄의 뜨거운 아스팔트 열기를 버텨가며 한국과 일본의 노동자들이 함께 외치고 하나가 되어 가는 시간이었다. 아사히글라스의 경쟁사인 이타글라스라는 유리제조 공장이 있다. 복수노조 사업장으로, 2천여 명의 조합원을 둔 일반기업노조가 있고 이타글라스노조는 조합원이 22명이다. 그 중 30대 초반의 젊은 조합원이 노조에 가입한 배경을 이야기했다. “일반기업노조는 2천 명이 넘는 조합원이 있지만 해고나 전직 등 부당한 대우에도 조합원을 위해 행동하지 않는다. 비록 22명이라는 적은 수의 조합원이지만 이타글라스노조는 부당함을 당한 조합원과 함께 싸워주고 노동자를 지켜준다. 노동조합이 노동자를 지켜주고 함께 싸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타글라스노조를 선택한 이유다”라고 말하는 그의 표정에는 자부심이 가득했다.

 

일본 원정투쟁은 그동안 머리로만 이해했던 것들을 보고 느끼게 해주었다. 일본 지원공투회의와 도로치바 국제연대위원회, 아사히비정규직지회가 국경을 넘어 “노동자는 하나! 한일 노동자 모두의 권리와 평화를 위해 함께 싸우자!” 라는 공동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리고 한국에서 투쟁하는 동지들을 위해 응원의 메시지를 담아 인증샷을 찍기도 했다. 처음 가본 일본 원정투쟁을 통해 한일노동자 국제연대의 필요성을 실감했다.

 

   

‘다른’ 노동자로, 공장으로 돌아가는 날까지

 

불법파견 1심 선고가 났지만 아사히글라스는 여전히 꿈쩍 않고 있고, 5차 일본 원정투쟁 이후에도 우리의 해고 투쟁은 계속되고 있다. 2015년 7월 시작된 투쟁은 이제 5년째 접어들었다. 짧지 않은 시간이다.

저임금과 장시간노동, 부당한 차별의 현실을 바꾸고자 노동조합을 만들었다. 공장에서 쫓겨나 거리에서, 우리는 이전과는 다른 세상을 보았고 경험하며 싸우고 있다. 전국 각지에서 싸우고 있는 비정규직 동지들과 함께 투쟁하며, 아사히글라스 현장의 변화만이 아닌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꿈꾸는 시간이다. 너무 길어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해고 투쟁의 시간들은 분명 우리들의 이후 삶에 큰 힘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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