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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호 NO.5|05|2002
【주장1】민주노조운동의 혁신이 필요하다

:: 2002-05-01   조회: 1555

오늘 불안정노동 철폐투쟁은 그것이 아무리 고통스러울지라도 민중의 삶을 송두리째 파괴하는 자본과 정권의 신자유주의에 맞서,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기본 권리, 그리고 공동체의 지향을 밀고 나가는 길이다. 그 승리를 앞당기는 것은 바로 노동운동진영의 헌신과 굳센 의지와 단결된 투쟁이다. 그러나 현재의 민주노조 운동은 어떠한가. 발전노조의 파업투쟁의 과정에서 보여준 민주노총의 모습, 비정규직 투쟁을 만드는데 있어서의 민주노총의 모습에 대한 비판없이 오늘 민주노조 운동의 현실을 말할수 없다.


신자유주의가 만들어낸 노동자 민중 전체의 삶과 고용의 불안정화, 그러기에 불안정노동철폐투쟁은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투쟁이다.



노동의 불안정화는 신자유주의가 취해야만 하는 생존전략이었다. 70년대 이후 전세계적으로 이윤율이 하락하면서 경제위기가 닥치고, 급격하게 경쟁이 격화되면서 자본간의 약육강식은 노동자에 대한 극악한 초과착취를 초래하였다. 자본은 시장의 불안정성과 경쟁의 고통을 노동자들에게 떠넘기고 노동조건을 악화시키는 방향으로 자신의 생존전략을 택했다. 급격한 성장의 시기에 자본은 노동자들을 기업 내부로 귀속시키고, 그 속에서 병영적 훈련을 시키면서 노동자가 기업의 흥망성쇠와 자신의 생존을 동일시하도록 만들어왔다. 그런데 자본은 이제 쓸모가 다해버린 폐기물을 처분하는 것처럼 노동자들을 기업 바깥으로 내몰아, 원하는 시기에 원하는 만큼만 쓰고 버리는 시스템을 만들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신자유주의는 고용을 파괴하는 것에만 그치지 않는다. 노동력 비중을 줄이려고 노동자수를 줄이면서 고용되어 있는 노동자들에게는 엄청난 노동강도와 노동강도 악화를 강요한다. 대우조선에서 일부만 건강검진을 했음에도 76명이나 되는 노동자들이 근골격계 질환으로 당장 입원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고, 3년 동안 173명의 집배원이 과로로 죽음에 이른 상황은 이를 말 말해준다. 이런 점에서 노동의 불안정화는 노동자 모두의 문제일 수밖에 없다. 신자유주의는 노동자들이 자신의 생명을 파괴하면서까지 생산성을 높이게 하고, 이를 통해 다시 자신의 고용기반을 파괴하는 악순환을 경험하도록 만든다. 이처럼 불안정노동층의 확대는 자본의 노동유연화를 가능하게 만들고, 그 유연화의 결과로 또다시 불안정노동층이 확산된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결국은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불안정노동층으로 편입된다. 이렇게 불안정노동층이 확산되고, 노동력이 기업 외부에 존재하게 되면, 자본은 노동에 대해 이전과 같은 통제력을 발휘할 수 없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자 사이에도 위계를 만들고, 경쟁을 시킴으로써 여전히 통제력을 유지하려고 한다. 일용직과 임시직, 간접고용과 단시간 노동, 특수고용직, 이주노동자, 장애노동자 등 다양한 불안정노동층의 존재형태는, 객관적 현실이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불안정노동층 내부에도 경쟁과 위계를 만들고자 하는 자본 의지의 산물이다.
하지만 현실의 비정규직노동자들은 이런 자본의 의도를 간파한다 할지라도 생존의 위협으로 경쟁을 하면서 연대의 정신을 발휘할 수 없게된다. 40만원의 임금으로 살아가야 하는 시설관리 미화원 노동자, 월 25만원 이하의 수입으로 살아가는 14.1%의 장애인 노동자, 임금노동자로 인정도 받지 못하는 월 60만원의 산업연수생 이주노동자를 생각해 보라. 게다가 일자리에서 밀려난 실업노동자들은 친지의 보조로 생계를 유지하고, 그마나 정부 보조를 받는 노동자는 2.5%에 불과하다. 또한 우리는 최옥란 동지의 고통스러운 죽음을 통해 생존을 보장한다고 떠들어댔던 '국민기초생활법'이 오히려 노동에서 밀려난 노동자들의 삶을 파괴하는 제도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생존의 위협과 고통 때문에 노동자들은 제살 깎아먹기 경쟁을 수용할 수밖에 없다. 신자유주의에서 빈곤화는 자본의 주요한 전략인 것이다.


기업 내외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불안정화를 뒷받침하는 제도와 함께 전개되는 신자유주의적 노동유연화



노동의 불안정화는 기업 내적으로는 비정규직의 확대로 표현된다. 자본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노동자들을 나눠놓고 일상적 차별 기제들을 동원한다. 비정규직에 대한 심한 차별은 단지 초과착취를 위한 것만이 아니라, 노동자들의 집단성을 파괴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안전장구를 다르게 지급하는 것, 비정규직 기숙사에는 찬물만 나오는 것, 심지어는 식비까지 다르게 지급하고, 각종 편의시설을 이용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돈 때문만이 아니다. 정규직들에게 우월감이라고 하는 허위의식을 심어놓고, 비정규직들에게는 무력감을 심어놓아서 결국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연대투쟁을 가로막게 하는 고도의 노동관리전략인 것이다. 정규직이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을 용인하는 것은 이러한 노동관리전략에 노동자들이 포섭된 결과이기도 하다.
노동의 불안정화는 기업 외적으로는 불안정노동층의 노동권 박탈을 전제로 한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요구하고 투쟁을 하게 되면 그 자체로 자본의 의도가 무너지는 것이기 때문에 자본은 반드시 불안정노동층의 단결과 투쟁을 봉쇄한다. 간접고용 노동자들은 원청업체의 사용자성 불인정과 부당노동행위 때문에, 직접고용 비정규직들은 복수노조 금지조항과 계약해지 때문에 권리를 인정받지 못한다. 특수고용 노동자들은 노동자성 자체를 부정 당한다. 이주노동자들은 산업연수생이라는 허울 좋은 제도 속에서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으며, 장애인 노동자들은 고용 자체가 부정 당한다. 자본은 노동자들의 권리를 '시혜'로 바꾸고, 자신들이 허락하지 않는 한 권리를 찾을 수 없게 만든다.
이러한 노동권의 부정은 단지 상대적으로 더 불안정한 노동자들에게만 미치는 것이 아니다. 더 불안정한 노동자들의 존재 그 자체가 전체 노동자들의 단결을 해치고 이것은 실질적으로 노동권을 무력화한다. 결국 불안정노동층의 노동권 박탈은 결국 전체 노동자들의 노동권 박탈로 이어진다. 이러한 불안정노동층을 확산하고 고통을 사회적으로 확산하는 것은 '구조조정'이 되며, 이 구조조정을 각종 법·제도의 변화에 의해 뒤받침된다. 자본은 구조조정을 해야 모두가 살아남을 수 있다는 허구적 이데올로기로 밀어붙였고, 많은 노동자들이 정리해고 당하거나 비정규직이 되어야 했다. 96·97년 총파업투쟁에서의 패배로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가 입법화된 이후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더욱 확산되었으며, 이제 자본과 정권은 노동시간 유연화를 강제하는 기만적인 주5일제나, 비정규직의 노동기본권을 박탈하고 확산하는 '비정형노동자 보호대책'등을 노사정합의라는 틀로 관철시키려고 한다.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이나 4대보험 제도의 부분적 도입은 겉으로 보기에는 노동의 불안정화에 대한 사회적 보호장치를 마련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노동유연화를 지탱하고 불안정한 노동을 유인·강제하기 위한 것으로 설계되어 있다. 이처럼 자본이 최근 노동계에 들이밀고 있는 모든 법률은 철저하게 불안정노동층의 확산과 고통 전가라는 자본의 정신에 입각해있다.


그러나 현재의 민주노조운동은 불안정노동층의 확산과 무권리 상태에 저항하지 않고, 오히려 정규직의 협소한 이해관계를 대변하기 위한 방식으로 투쟁해왔다.



민주노조운동은, 기업 내부적으로는 노동자들 사이의 이해관계를 분할시켜서 노동자들의 집단성을 파괴하는 자본의 전략에 조응해서, 정규직 노동자들의 이익을 위해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희생시키는 방식을 택해왔다.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에서 16.9%로 비정규직을 활용하고, 고용조정 시에 비정규직을 먼저 해고한다는 '고용안정협정서'에 서명한 것이나, 캐리어 노동조합이 구사대가 되어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투쟁을 가로막은 것은 극단적인 사례이지만, 이랜드나 신호제지 등의 사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그런 경향으로 투쟁해왔다. 비정규직의 확대에 저항하지 않는 경우도 비일비재하고, 현장에서의 차별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치부하는 경향도 대단하다. 일반적으로 대다수의 노동조합이 정규직들의 임금인상과 단협 체결에만 힘을 쏟고, 결과적으로 그 고통을 비정규직에게 자본이 전가시키도록 내버려둬왔다는 사실은 일반적인 민주노조운동의 활동이 자본의 분리전략에 조응해왔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노동자 자체가 분할되는 상황에서 조직된 노동자들의 이해관계에만 입각해있는 노동조합은 노동조합으로서의 대표성도 갖추지 못하는 소수 노동자들의 이익집단으로 전락하게 되고, 조직된 조합원들은 노동조합이 자신들만의 이익을 대표하도록 하는 것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동시에 민주노조운동은 사회적 차원에서의 분할에도 소극적으로 대응하면서 자본의 전략을 묵과해주거나, 노사정위원회 등의 왜곡된 합의구조에서 불안정노동자들의 이해관계와 정규직 노동자들의 이해관계를 맞바꾸기 하는 것을 암묵적으로 동의했다. 민주노조운동은 자본이 시행하려고 하는 '고용허가제'에 대해 명백한 반대 입장을 표명하지 못하고 있으며, 장애노동자들의 노동권 박탈에 대해 구체적인 대응투쟁을 조직하지 않고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노동법 개악 기도를 여전히 비정규직들만의 문제로 돌리고 있다. 심지어는 2001년 2월에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단결권을 봉쇄하는 복수노조 금지조항과 전임자임금지급 금지조항이 맞바꾸기 할 때 즉각적인 항의투쟁을 조직하지 않은 채 암묵적으로 동의하거나,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을 더욱 장시간 노동으로 몰아넣는 여성노동자들의 야간·연장·휴일근로와 산전산후휴가 연장을 합의할 때 이것을 여성노동자만의 문제로 국한시켰다. 이러한 과정 역시 자본의 분할 전략에 정확하게 조응하는 과정이다.
또한 민주노조운동은 시민사회운동과의 연대 속에서 노동의 불안정화에 대응하는 '사회안전망'을 만드는 방식으로 불안정노동층의 고통을 완화시키고자 해왔다. 건강보험투쟁,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쟁취투쟁, 산재보험개혁투쟁, 비정규보호입법투쟁 등 법제 개정·청원운동이 그것이다. 물론 이 투쟁들은 청원투쟁으로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고, 강력한 투쟁이 전개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이러한 사회개혁투쟁은 노사정합의를 위한 압력수단이었고, 이러한 투쟁은 정권과 자본이 원하고 있는 바, '구조조정'의 이데올로기적 정당성을 확보하게 하는 과정으로 귀결되기도 했다. 삶의 권리나 노동의 권리는 누구에 의해 대리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이 결정권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설령 실업수당이 필요하더라도 그것이 건강한 일자리를 대체할 수는 없는 법이다. 건강한 일자리를 파괴하면서 실업수당이 있다는 조건을 내세운다면 그야말로 주객이 전도된 것이다. '사회안전망'적 논리는 이주·장애·실업노동자들을 포함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현실적 요구나 고통의 원인에 대해서가 아니라, 증세의 완화를 내세우면서 자본의 이데올로기를 오히려 보완해주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런 점에서 '사회안전망' 논리도 자본과 정권의 입장에 조응해왔던 것이다.


민주노조운동 내에서의 불안정노동철폐투쟁을 가로막는 왜곡된 관점



불안정노동층의 확산과 투쟁으로 민주노조운동은 비정규직 노동자나 이주노동자, 장애노동자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자신의 역할을 불안정노동층에 놓인 노동자들의 투쟁을 지원하고 연대하는 것으로 국한하며 자신의 과제로 하지 않는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자신보다 열악한 처지에 놓여있으므로 도움을 줘야 한다는 허구적 우월감에 기초해있다. 한편으로는 노동의 불안정화라는 자본의 전략에 조응해서 불안정노동 확산에 기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비정규·장애·이주·실업·영세사업장 노동자 등의 투쟁을 지원하는 모순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가 이들의 투쟁이 너무나 힘들고 고통에 처하게 되거나 정규직 노동자들의 이해관계와 부딪히게 되면 쉽게 비정규·장애·영세·실업·이주 노동자들의 투쟁을 뒤로 돌리거나 배반하는 경우도 생긴다. 불안정노동철폐투쟁은 모든 노동자들의 불안정화라는 현재의 상태에 대한 민주노조운동 전체의 투쟁이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에 나타난 몇가지 왜곡된 관점은 그 불안정노동철폐의 길을 막고 있기에 그 심각함이 드러난다.

첫째, 민주노조운동 내부에서는 불안정노동철폐투쟁을 '조직화'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민주노조운동의 조직률이 낮아서 힘을 발휘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에 아직 조직되지 않는 곳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 대상으로 비정규직 등 상대적으로 불안정한 노동층을 고려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노동자들이 조직되지 않은 이유는 노동기본권이 박탈당할 수밖에 없는 현재의 상태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이 노동자들이 조직되고 투쟁을 시작한다 하더라도 그 성과는 크지 않다. 이렇게 되면 '조직화'를 주장하던 사람들은 비정규직 등에 대해서는 투입에 비해 산출이 별로 없다는 이유로 등을 돌려버리고 공무원 조직화등 대규모 기업의 조직화에 쉽게 눈을 돌려버리곤 한다. '조직화' 문제로 접근하는 순간 그만큼 조직화가 어려운 불안정노동층의 과제가 뒤로 돌려지는 것은 필연이다.
둘째, 노동의 불안정화에 대응하는 투쟁을 법·제도개선 투쟁으로 제한하는 흐름도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나 장애, 여성, 이주, 영세사업장 노동자들의 노동권을 박탈당하는 가장 큰 이유가 신자유주의적 노동유연화 그 자체에 있음을, 그리고 그것이 우리 운동 전체의 노동권을 박탈하는 과정으로 자리잡고 있음을 망각하고, 법·제도 개선을 통해 비정규직을 비롯한 불안정노동층의 과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대단히 순진한 발상이다. 법·제도 개선이 중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 만만한 과정이 아니다. 민주노조운동 전체가 총력을 다해서 투쟁하지 않으면 신자유주의가 본질적으로 강제할 수밖에 없는 노동권의 박탈 상태는 결코 개선될 수 없다. 그런데도 이 문제를 요구안을 잘 만들고, 노동부나 노사정위원회나 국회를 압박하는 것으로 해결될 것이라는 '순진한' 발상이 오히려 불안정노동철폐투쟁을 희화화하고 정책을 마련하는 데에 힘을 쏟도록 해서 투쟁의 집중도를 떨어뜨린다.
셋째, 산별노조 건설 문제로 비정규직 조직화를 치환하는 경향도 있다. 그러나 현재 산별노조 건설이 몇몇 대공장의 조직형식을 바꾸는 문제로 사고된다면 당연히 이것은 불안정노동철폐를 핵심으로 하는 비정규직 조직화를 불가능하게 할 것이다. 산별노조가 건설되면 형식상 조직화의 편리함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문제의 핵심은 '조직화'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여전히 노동의 불안정화를 강제하고 차별을 재생산하는 기제들, 그것을 사회적으로 제도화하는 사회적 흐름에 조응해왔던 운동의 흐름을 뒤바꾸지 않는 이상, 대공장 중심성과 정규직 중심성이 살아 숨쉬는 산별노조가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는 대안은 결코 되지 않는다. 특히 산별노조 건설 이후 비정규직을 조직해야 한다는 주장이 불안정노동철폐투쟁을 내일의 일로 미루는 역할을 하고 있는 상황을 목도하기도 한다. 자신의 기득권을 놓치지 않기 위해 산별노조 건설 주장 뒤로 숨는 주장도 분명히 경계해야 한다.
넷째, '비정규직 정규직화냐 차별철폐냐' 하는 이분법 구도를 설정하고, 정규직화와 차별철폐가 다 중요하다는 주장도 있다. 객관적으로 전혀 틀린 말은 아니지만 명백하게 잘못된 논점에 잘못된 대응이다. '정규직화'냐 '차별철폐'냐 하는 것은 당연히 대립쌍이 아니다. 둘 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생각은 자칫 정규직화는 어렵기 때문에 일단 차별철폐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단계론으로 발전할 수 있는 생각이기 때문에 문제이다. 차별철폐는 쉽고 정규직화는 어렵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문제의 본질을 잘못 보는 것이다. 차별철폐가 만약 정규직의 시혜라는 관점에 입각한 것이라면 쉬울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정규직 노동자들의 의식을 변화시키고 계급적 단결의 힘을 키우는 데 전혀 보탬이 되지 않는다. 핵심은 고용불안 때문에 비정규직을 희생해서라도 자신만이라도 살아남고 싶어하는 정규직의 의식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 정규직의 이해관계와 비정규직의 이해관계가 부딪힐 때 정규직 편에 설 것을 요구하는 조합원들에게 얼마나 단호하게 '계급적 단결을 설득할 수 있는가'이다.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결국 차별철폐가 되던 정규직화가 되던 지금까지 운동의 관행을 뒤집고 사측의 공세에, 노동자들의 분할전략을 어떻게 정면으로 돌파할 수 있는가가 핵심이다. 이런 점에서 '일단은 차별철폐부터 하자는 주장'은 결국 노동조합이 자본의 전략을 정면으로 돌파하는 것을 피해갈 길을 마련해주면서 결국은 자본의 분할전략에 조응하는 이데올로기로 이용되기 쉽다.


민주노조운동을 새롭게 세우지 않고서는 불안정노동철폐투쟁이 민주노조운동의 중심 과제가 되는 것이 불가능하다.



민주노조운동을 새롭게 세우는 것은 '불안정노동철폐투쟁'을 지금 당장 시작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노동의 불안정화가 노동자계급의 집단성을 파괴하여 민주노조운동을 무력화하고, 노동자계급에 대한 초과착취와 빈곤화를 강제하는 것이니 만큼 이 투쟁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대투쟁이며, 우리 민주노조운동이 뚫고 나가야 할 핵심 과제이다. 불안정노동철폐를 위한 비정규직의 투쟁을 '이것은 단위사업장의 투쟁일 뿐'이라고 말하면서 투쟁의 어려움을 피해가고 불안정노동철폐투쟁을 자신의 문제가 아닌 양하는 민주노조운동의 기만적인 모습을 바꿔야한다. 불안정노동철폐투쟁은 미뤄놓고 여유 있을 때 조금씩 하면 되는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한번 미뤄놓는 딱 그만큼 자본과 정권의 노동의 불안정화 전략은 우리를 파고들어 내부를 분열시키고 노동의 불안정화를 확산시키게 될 것이다. 그리고 딱 그만큼 민주노조운동은 그러한 자본의 요구에 조응하는 일을 반복하게 될 것이다.

첫째, 민주노조운동을 새롭게 세우는 것은 노동자계급의 통일과 단결 정신을 실현하는 과정이어야 한다. 노동조합은 말 그대로 대중조직이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적 노동유연화가 전면화되면서 노동자대중은 단일한 대중이 아니다. 자본에 의해 찢기고 위계화된 분열된 대중이다. 지금의 구조에서 계급적 집단성은 자본에 의해 유폐되었다. 조직된 대공장 남성 노동자들은 언제부턴가 이러한 위계와 분열의 위 서열을 차지하게 되어버렸다. 이런 구조에서는 아무리 정규직 대공장 남성 노동자들이 단결과 연대를 외쳐도, 자신의 사업장 구석구석에 존재하는 전체 노동자들로 단결의 눈을 돌리지 않는 이상 허구이다. 투쟁을 아무리 열심히 하고 현장을 아무리 열심히 조직하더라도 이것은 '그들만의 투쟁'이 될 뿐이고 이 역시 자본의 의도에 조응하는 것이다. 그런데 노동조합 간부나 활동가들이 '전체 노동자의 단결'을 외치면 정규직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에 등을 돌린다. 민주노조운동의 성장 과정에서 자본의 분할전략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왔던 지금까지의 관행이 정규직 노동자들을 자신의 이익에만 젖어들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지금 단결과 연대를 이야기할 때 정규직 노동자들이 반발하는 것은 우리 운동의 자업자득이다. 따라서 민주노조운동의 새로운 기풍을 세우는 것은 상황을 이렇게 만들어왔던 활동방식을 전면적으로 수정하고, 단결의 기치를 다시 세워 정규직 노동자들을 설득해서 자본의 분할전략을 정면 돌파하겠다는 결의에 바탕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고 우회로를 설정해서 정규직 노동자들의 반발을 피해가겠다는 발상은 문제를 결코 해결할 수 없다.
둘째, 민주노조운동을 새롭게 세우는 것은 '피해 최소화 논리'를 뛰어넘어 계급적 신뢰를 회복하는 투쟁이다. 신자유주의를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용인하는 순간, 그래서 당장은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향을 찾는 순간, 최소화된 피해의 내용은 구조조정의 승인이나 노동의 불안정화에 대한 승인이 된다. 이것을 전제로 해서 정규직 노동자들의 임금이나 고용의 일부를 인정받게 된다. 피해최소화 논리에 깔린 이러한 주고받기는 결국 노동자들의 피해를 최소화하기는커녕 노동자계급의 본질적인 힘인 '노동의 집단성'을 파괴하는 방식으로 작동했다. 비정규직 노동자 확대나 그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이익을 관철시켜 본 정규직 노동자는 당연히 노동자전체의 계급적 연대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의 노력으로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노동자들에게도 '피해최소화 논리'가 내면화된다. 투쟁의 기반 자체가 파괴된다. 노동자계급에게 두려운 것은 조직이 탄압을 받아서 깨지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이 개별화되어서 경쟁을 내면화하게 되는 것이다. 노동조합을 신뢰하지 않고 자본에게 빌붙게 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결코 극복할 수 없는 무언가가 아니다. 우리의 투쟁에 의해 변질되고, 깨지는 현실의 역관계 그 자체이다. 불안정노동철폐투쟁을 통해 우리는 공세적으로 계급적 단결을 도모하면서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대투쟁을 조직할 준비를 해야 한다.
셋째, 민주노조운동을 새롭게 세우는 것은 노동자들의 경제적 권리 획득에 국한하지 않는 정치적 투쟁 주체로 일어섬을 의미한다. 많은 동지들이 불안정노동의 문제에 있어서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권리의 획득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기에 단위사업장의 문제를 넘어서는 사회적 투쟁의 조직화가 중요하다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우리 운동이 그동안 사회적 투쟁을 해오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자본의 전략에 조응하는 방식으로 사회적 투쟁을 해왔다. 하나는 정규직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비정규직의 권리를 양보하는 사회적 투쟁을 진행해왔고, 다른 하나는 현실의 투쟁과 법 제도 개선 등의 사회적 투쟁을 분리시켜, 요구를 대리해주면서 현실의 투쟁을 왜곡시키는 방식으로 사회적 투쟁을 해왔다. 중요한 것은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투쟁의 내용이다. 그 내용의 핵심은 자본의 분할전략을 깨는 것이며, 신자유주의적 노동유연화를 제도화하려는 모든 것에 맞서는 것이다. 예를 들어 '주5일제'로 표상된 '노동시간 유연화'라는 불안정화 전략에 맞서 정규직과 비정규직 모두의 단일한 투쟁전선을 만들어야 하는데, '중소영세, 비정규직 희생 없는 주5일제 쟁취'를 외쳐서 비정규직과 정규직의 이해관계가 다른 것처럼 보이게 만들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동정과 시혜의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방식의 투쟁은 이제 지양해야 한다.
넷째, 민주노조운동을 새롭게 세우는 것은 조직운영의 혁신을 통해 불안정노동철폐투쟁을 위한 제도와 체계를 만드는 것이어야 한다. 그것은 노동의 불안정화로 인해서 밀려나오게 된 비정규직·장애·여성·이주·실업노동자들의 투쟁을 확산시키고, 이들의 문제의식을 민주노총 사업 전반에 반영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그럴 때 자본의 분할전략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 민주노조운동의 구조로는 이 노동자들이 구조적으로 배제당할 수밖에 없다. 지금은 비록 이들이 배제당하고 있지만 문제의식을 확산시키다보면 곧 중심 부분을 차지할 것이라는 생각은 오산이다. 부르주아 조직도 인원수에만 비례해서가 아니라 직능의 문제의식을 반영하려고 한다. 그러나 현재의 민주노총 체계는 말 그대로 인원수 중심, 효율성 중심의 체계이다. 그러다 보니 비정규직 등의 문제는 언제나 양념으로만 제기될 뿐이다. 인원수 중심의 체계, 효율성 중심의 체계를 넘어서서 노동자 전체의 연대정신을 반영하는 방식으로 조직체계를 개편해야 한다.

절대 빈곤층의 확산, 전민중의 빈곤화, 실업의 구조화, 교육과 보건의료의 공공성 박탈, 노동권의 박탈 등 신자유주의적 공격은 일부의 민중만을 향하고 있지 않다. 신자유주의 공세는 전사회 계급과 계층을 향해 이루어지면서 인간의 삶 자체를 파탄시킨다. 경쟁력이 없는 인간은 버려지고, 버려지지 않은 인간들은 다시 자신의 고용기반을 파괴할 노동강도 강화를 수용하며 죽을 만큼 일한다. 실업과 반실업을 반복한다. 가계부채는 쌓이고 생활공동체는 파괴된다. 일부 자본가계급을 제외한 모든 민중들의 삶은 피폐해진다. 이러한 신자유주의 공격에 맞서는 투쟁은 본질적으로 '경제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것이다. 말 그대로 대중의 정치투쟁으로 전화될 때 투쟁의 승리도 가능하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수세적 대응을 넘어서서 인간의 존엄과 공동체의 가치를 세우기 위해, 더 이상 죽지 않고 살기 위해 신자유주의를 넘어서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공공연하게 이야기하고 투쟁을 조직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고용'에 대한 관념에서 벗어나 투쟁을 조직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의 요구는 '고용된 자들의 권리'나 '고용될 권리'가 아니라, '살아있는 모든 자들의 권리'여야 하고 생활권, 노동권, 노동조건에 대한 자주적 결정권이어야 한다. 우리가 생존해있다는 이유만으로, 우리가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도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 이렇게 될 때 생존하기 위해 남을 짓밟는 치열한 경쟁의 고통이 제거될 수 있다. 이렇게 될 때에야 장애·여성·이주·실업·비정규직 노동자들을 고용의 안전판이나 고용의 위협자로 사고하지 않고 전체 노동자 총단결 투쟁을 조직할 수 있다. 자본이 불안정노동층의 노동기본권을 박탈하고자 한 것은, 이들 불안정노동이 자신들의 투쟁으로 노동의 불안정화를 박살낼 수 있는, 투쟁의 중요한 한 축이기 때문이다. '노동기본권 쟁취' 투쟁이 필요한 것이기도 하지만 결국 '정치적 문제제기'와 '투쟁을 통한 돌파'라는 현재의 과제를 생각한다면 우리 스스로 '노동조합'으로 조직화의 시야를 국한하지 말고 조직의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둘 필요가 있다고 본다. 현재로서는 개별의 요구를 갖고 힘겹게 개별 투쟁하는 것을 반복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작년 '민중복지 한마당'을 통해 장애·여성·실업·이주·영세사업장·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요구와 고민을 공유할 수 있었다. 올해는 "2002년, 불안정노동철폐, 노동권·생활권 쟁취를 위한 공동투쟁"을 만들어서 비록 품앗이 연대투쟁이기는 하지만 공동투쟁의 가능성을 만들어가고 있다. 이제는 동원의 효율성이나 소외된 노동자들이라는 공통점에 근거해서가 아니라, 이 투쟁이 바로 불안정노동철폐투쟁의 중요한 한 축이 될 것이라는 점에서 공동투쟁의 기반이 마련되고 있다. 이러한 공동투쟁의 가능성을 더욱 높여나갈 때, 불안정노동철폐라는 정치적 투쟁의 중요한 근거를 함께 마련하는 것이 된다. 이와 함께 불안정노동철폐투쟁은 민주노조운동의 혁신, 불안정노동층의 자기 조직화를 통해, '계급투쟁'으로 만나야 한다. 불안정노동철폐투쟁을 자신의 과제로 삼고, 그것이 미래의 과제가 아니라 지금의 과제라는 것을 이해하고 그렇게 하기를 원하는 동지들이라면 함께 만나야 한다. 그럴 때 지금까지의 한계를 딛고 불안정노동철폐투쟁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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