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에서는 1984년 이후 금속노조를 중심으로 주 35 노동시간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었다. 이 논의에서 자본가들의 기본 입장은 노동시간 단축의 전제조건으로 기계작동시간을 늘릴 수 있도록 공장가동시간을 늘리는 것이다. 이미 주 40시간으로의 노동시간 단축에 있어서도 노동의 유연화를 노조가 수용하는 것이 전제조건이었다. 이 글에서 본인은 노동시간단축과 공장가동시간의 관계를 불안정 노동을 양산하는 노동 유연화의 관점에서 역사적으로 파악하고자 한다.
여기서 말하는 노동시간이란 노동자가 자기가 일하는 곳에서 머무르는 시간으로 정의된다. 다른 말로 하면 자본가가 노동자가 가지고 있는 노동력을 전용 할 수 있는 절대시간을 말한다. 이러한 노동시간 정의에 의하면 일터로 가고 오는 출퇴근시간과, 휴식시간, 교육시간 그리고 식사시간은 노동시간에서 제외된다. 자본가들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도입 이후 노동시간을 독점적으로 지배하기 위하여, 그리고 노동자의 저항을 무력화하기 위하여 항시 새로운 경영기법을 발달시켰다. 우선 노동시간과 경영기법의 역사적 측면을 파악하고 최근의 노동시간 단축과 노동 유연화 논의를 분석한다.
근대 공장체제
현재의 노동시간구조는 역사적 발전의 결과이다. 자본주의적 산업화 이전에는 노동시간은 일반적으로 자연현상과 종교적인 교리와 가치에 의존하였다. 종교적인 가치가 생산계급의 일상을 지배하던 중세에는 115일의 휴일과 종교의식을 행하기 위한 52일의 일요일을 제외한 연 200일 정도가 노동일이었다. 이 당시 노동시간과 강도는 기후, 노동일 당시의 날씨, 계절, 노동력 상실(부상이나 기구 파손 등)로 인한 결손일, 그리고 수공업 노동자의 경우에는 마스터의 습관에 따라 일정정도 불규칙적으로 실행되었다. 즉 이 당시의 노동시간은 구체적으로 고정되지 않았다. 하지만 13세기에 들어서는 섬유산업이 발달한 특정 지역에서는 작업시간과 휴식시간을 알리는 마을(공장) 종이 설치되었다. 공장에 설치된 종은 당시의 도제들의 정치적 비중과 도시 임금노동자의 존재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공장의 규모가 더욱 커지고 마스터가 될 수 없는 도제들의 수가 급증함에 따라서 일용직 노동자의 수가 급증하였고 이들은 일정한 노동시간을 요구하는 투쟁단체로써 발전하였던 것이다. 위의 예에서 우리는 자본주의적 산업화 이전의 사회에서도 자기 스스로 결정하지 않는, 외부로부터 통제되는 노동시간이 존재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급속한 산업화의 과정에서 비로소 인간의 행위를 시간을 통하여 통제하려는 엄격한 훈련이 시작되었다.
산업화의 진전과 특히 인공조명을 이용하여 작업을 가능하게 할 수 있게 됨으로써 노동자에 대한 노동의 규칙성, 시간훈련 등의 노동시간 통제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러한 노동시간 훈련은 처음에는 노동자 자신들이 아닌 외부로부터의 강제에 의한 것이었지만 노동자들에 의하여 점차적으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노동자 자신이 아닌 외부로부터 정해지는 노동시간에 대한 시간규율과 이의 인정은 점차로 일반적으로 되었고, 오늘 날 노동시간을 규정하는 본질이 되었다.
우리는 이러한 현상을 다양하게 파악할 수 있다. 철도의 도입과 확산은 자본가가 노동시간을 계획하는데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원료와 기계의 도착 시간의 정확성이 일반화되기 시작). 생산시간을 계획하고 조정하는 경영기법이 시작 된 것뿐만 아니라 시간과 공간에 대한 개념이 근본적으로 변화하였다. 즉 생산을 계획하는데 있어서 공간의 의미는 현저히 약하게 하였으며 상대적으로 시간의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공장조직을 시계처럼 정확하게 구획하려는 사고가 경영자의 의식에 만연되었다. 자본가들은 자신의 기업을 시계의 소유자가 부재중에도 똑같이 그리고 쉬지 않고 계속 가는 시계와 유사하게 조직하려고 시도하였다.
자본주의 생산의 전 사회적 관철은 개인적으로 결정되는 노동시간조절의 가능성을 점차로 약화시켰다. 공장에서 생산의 독점적 지위가 구체화되기 시작한 공장체제의 확산은 일상과 구분이 확실하지 않게 섞여있던 노동시간을 순수한 노동시간으로 변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공장 이외에서 노동자가 보내는 사회적 시간의 의미와 내용은 공장에서의 순수노동시간의 합리성을 보조하는 일차원적인 것으로 축소시켰다. 이러한 변화과정은 효율성, 경제적 합리성의 원칙을 거부하는 모든 전(前)자본주의 요소들에 대한 제거를 의미하였고 또한 공장뿐만 아니라 사회적 차원에서 자본가의 권력획득 과정이었다. 이러한 자본가의 권력획득 과정을 노동시간의 측면에서 관찰하면 공장에서의 일정한 노동의 지속, 노동조건과 상태 그리고 노동시간의 구조(생산하는 노동시간과 휴식형태의 노동중단)를 자본 임의로 계획하고 통제하는 권리를 의미하였다. 자본가에 의하여 임으로 노동시간이 통제 제어되면서 임금노동자는 두 가지 측면에서 시간에 대한 주권을 점차로 상실하였다.
첫째, 자본가에 의하여 계획된 생산의 필요성이 임금노동자가 노동력을 제공해야 하는 시점, 노동의 지속 그리고 휴식의 길이를 일방적으로 결정하였다.
둘째, 임금노동자들은 노동과정의 시간배분을 자기의 능력에 따라 자기책임 하에 짜는 가능성을 점차로 상실하였다.
위의 테제는 역사적으로 보면 매우 흥미롭다. 왜냐하면 오늘 날 진행되고 있는 유연화 논쟁에서 유연화가 노동시간에 대한 노동자의 주권을 다시 돌려 받는 주장이 있기 때문이다. 노동시간 구조의 점차적인 경직화는 분업의 특수한 발전에서 기인한다. 말하자면 개별 노동의 기계로의 결속은 노동자간의 그리고 각각 기계를 연결하는 축이 운동하는 공장가동 시간과의 “시간적인 조화”를 절대적으로 필요하게 하였다. 이제 일반적으로 관철된 대공장 체제와 이를 통하여 생겨난 조절과 통제 문제는 “노동시간 집단적 규칙화”의 경향을 강화하였고 이는 또한 경직된 공장가동 시간과 결부되었다.
기술의 발달이 가져온 변화이외에도 공장체제가 도입된 초기시기에서의 개별 노동자의 노동시간과 공장가동시간의 경직된 연결은 노동시간의 과도한 연장을 결과하였다. 노동시간과 공장가동시간은 하나로 되었으며 “생산조직은 단지 기계장치의 기술적 논리와 임금체제의 경제적 논리”에 따라 조직되었다. 이러한 전개는 노동자의 육체적 심리적 재생산을 필요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노동조건을 만들어내었다.
임금노동자의 초기저항
자본가와의 노동계약을 통하여 시작되는 노동의 자본으로의 형식적 종속은 결코 노동의 실제적 종속(노동이 자본의 논리를 자기 것으로 하여 스스로 따라가는 것)을 의미하지 않았다. 1800년경에 영국의 섬유산업 분야에서 대공장 체제가 형성되기 시작할 때 이러한 대공장 생산이 노동자의 건강에 악영향을 준다는 것에 주위를 환기시킨 것은 의사들이었다. 통제되지 않던 아동과 여성 노동 그리고 공장에서의 지나치게 긴 노동시간은 노동자 대중의 건강을 매우 위협하였다. 하지만 영국정부는 콜레라 전염으로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여 노동력의 공급이 어려워지자 비로소 자나 치게 긴 노동시간을 통제하려는 논의를 시작하였다.
섬유공장의 주인이었던 로베르트 오웬은 여성과 아동 노동자들의 노동시간 단축을 주장한 최초의 공장주의 하나이었다. 오웬은 노동시간 단축을 통하여 착취를 억제하기 위한 목적뿐만 아니라 노동력 사용시간과 노동력 재생산을 위한 여가시간 사이의 조화로운 타협을 시도하였다. 이미 1817년에 오웬은 자신의 공장에 8시간 노동을 도입하였다 - 8시간 노동, 8시간 여가시간 그리고 8시간 수면시간. 오웬은 노동시간 단축이 생산을 향상시킬 수 있다는 자신의 생각을 자신의 동료 (공장주들)들에게 확신시킬 수가 없었으며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하여 섬유노동자 노동조합을 만들고자 시도하였다. 1830년대에 영국에서 노동자의 정치적 권리획득을 위해 진행된 챠티스트 운동에서 8시간 노동은 많은 지지자들을 얻게 되었다. 정치적 권리행사와 이를 위한 노동자 조직화를 위한 선정 선동을 근본적으로 가능하게 하기 위하여 노동자가 자기 마음대로 처분 가능한 자유시간의 필요성이 점차로 부각되었다. 이 당시 노동자 정치운동의 궁극적인 목적은 당시 영국에서 위협적으로 퍼지고 있던 실업을 저지하고 일상적인 가족생활을 다시 영위하는데 있었다. 이러한 활발한 정치적 선전선동의 결과는 섬유산업에서 아동과 여성 노동자의 노동시간을 10시간으로 제한하고 노동시간에 대한 공장주의 자율적인 결정을 제한한 1848년의 새로운 공장법이었다. 하지만 영국정부는 아무런 조건 없이 남성 노동자를 보호하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다 .
유럽에서만 노동시간 단축을 위한 노동자투쟁이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1861에서 1865년 사이의 미국내전 동안에 8시간 노동 구호는 파업하는 노동자와 군인의 상징이었고 투쟁은 매우 격렬하였다. 미국에서 8시간 노동시간을 위해 투쟁하고, 노동조합을 통하여 8시간 노동의 필수성의 논의로 이끌어낸 주체는 유럽에서와는 달리 섬유노동자가 아닌 좀 더 나은 직업교육을 받은 기계산업의 노동자들이었다. 맑스는 이러한 미국 노동자의 노력을 제 1차 노동자 인터네셔날에 수용하였다. 1866년 스위스의 제네바에서 열린 첫 번째 회의에서 맑스의 제안은 제 1차 인터네셔날이 추구해야할 기본조항으로 통과되었다.
“우리는 노동시간 제한을 위한 투쟁이 노동자 삶의 향상과 해방을 위한 다른 모든 노력들을 성공적으로 이끌 전제조건임을 공표 한다. 노동시간 제한은 노동계급, 말하자면 모든 국가의 민중의 건강과 육체적 에네르기를 다시 생성하기 위하여 그리고 노동계급에게 정신적 발전, 사회적 교통 그리고 사회 정치적 활동을 확실하게 하기 위하여 필요하다.... 우리는 8시간 노동을 법적으로 제한 할 것을 제안한다. 이러한 8시간으로 노동시간을 제한하는 것은 미합중국 노동자들에 의하여 이미 일반적으로 요구되었고, 회의의 결정은 이러한 요구가 전세계 노동계급의 일반적 요구로 끌어올리는 것이다”. (K. Marx "Instruktionen fuer die Delegierten des Provisorischen Zentralrats zu den einzelnen Fragen, MEW 16, Berlin 1962, S. 192)
맑스가 부르주아지 의회가 제정한 법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원칙을 부여한 것은 매우 특이하다. 1848년의 영국의 공장법 조항은 맑스에게 매우 깊은 인상을 주었으며, 맑스는 이 법이 노동자가 과거의 시간주권을 다시 찾는 수단의 하나로 파악하였다. 제 1차 인터네셔날이 실패 후 열린 제 2차 인테네셔날에서도 역시 법으로 규정된 8시간 노동의 요구와 투쟁은 회의의 주요안건으로 다시 수용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최초로 메이데이 행사가 열린 1890년 이후로는 8시간 노동시간 구호가 매년 열리는 노동절 행사의 주요 구호로 자리잡았었다.
이미 1800년 초반에 주장되어 1800년 중반에 확산된 8시간 노동시간에 대한 노동자의 투쟁이 근대 공장체제의 전 세계적 확산 이전에 노동자들의 주요 요구의 하나이었다. 근대 공장체제 도입 이전의 8시간 노동에 대한 요구는 외부로부터 강제되는 노동시간을 제한하려는 정치적 그리고 사회 문화적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좌파 노동운동 진영은 8시간 노동에 대한 요구를 통하여 많은 노동자 대중을 동원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급속하게 증대된 대중 동원력은 기술의 발전으로 공장설비의 기계화의 진전으로 인한 실업에 대한 공포와 그리고 심화된 노동강도가 노동자의 노동조건을 악화시킨 데 근본적인 원인이 있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노동시간의 명백한 한계를 요구하는 투쟁들이 점차로 커지고, 더욱 효력을 지니게 되었다. 이와 동시에 자본가들은 새로운 기술 수준에 근거하여 생산과정의 내부 시간구조를 최적화하여 이윤을 극대화하고자 하였다. 전문직 노동자들은, 부르주아지 직업품성의 이데올로기인, 시간은 돈, 즉 개별자본가에게는 시간절약=돈=자본이라는 기본 행위 지침에 빠져들 기 시작하였다. 극단적으로 짜여지고 지나치게 긴 노동시간을 타파하기 위한 8시간 노동에 대한 투쟁은 결국은 자본에 의하여 강제되는 시간의 극단적인 효율화에 대한 저항이었다. 즉 맑스가 설명한 것처럼, 절대노동시간을 늘려 필수노동시간의 단축과 이로 인하여 획득된 절약된 노동시간의 잉여노동을 자본의 부분으로 이전하려는 가능성을 여는 새로운 과정에 대한 저항이었다.
이 당시 봉건제적, 즉 아직도 전통적인 성향에 영향을 받던 노동자들이 노동시간 자체에 대항하여 투쟁하고 그리고 과도한 알콜 섭취로 지나치게 길고 어려운 노동시간과 싸우고 있는 반면에, 수공업자의 엄격한 규율과 공장 기계를 다루는 교육에 기초하여 양성된 전문직 노동자들은 당시로는 특별하다고 할 수 있는 노동윤리를 가지고 더욱 효율적인 노동시간을 위하여 싸우고 있었다. 산업화의 진전으로 결과된 점증하는 자본투입과 기계의 복잡함은 기업경영과정의 합리적 조직을 확보하기 위한 노동시간의 규칙성과 노동투입량의 계산 가능성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합리화의 과정과 대공장 체제의 확산 과정은 노동운동의 역사가 충분히 보여주듯이 결코 분쟁 없이 진행된 것이 아니었다.
테일러 주의와 노동시간
미국의 기술자인 테일러는 1890년경에 적대적인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간의 내란을 해결하고자 시도하였다. 그는 노동조직과 인간의 행위(노동자의 행위)가 자연현상처럼 실험이나 분석을 통하여 찾아낼 수 있는 법칙성이 내재하고 있다는 가정에서 출발하였다. 테일러에게는 실험을 통하여 검증된 과학적인 관리에 기초하여 노동조직이나 노동자 행위를 효율적으로 배치하고 이용하는 것이 생산의 최적화로 가는 유일한 올바른 길이었다. 테일러의 생각으로는 자본가(경영자)와 노동자의 정신적 혁명을 동반하는 생산과정의 기술적인 과학화는 이들간의 새로운 협력과 생산의 가속화를 결과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즉 이의 최종결과는 생산성의 향상으로 이윤과 임금이 동시에 상승한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노동자와 자본가간의 제로 섬 게임(자본가와 노동자는 경제적 이해에서 서로 화합할 수 없다는)의 원칙이 드디어 깨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노동자의 작업시간과 동작연구는 이러한 생산과정의 과학화를 관철시키기 위한 보조수단이었다. 인간 노동의 합리화와 그리고 시간 낭비의 축소를 통하여 생산성의 향상에 도달하기 위하여 공장에서의 모든 노동과정들과 개별노동자들의 손놀림은 정확하게 관측되고 연구되었다. 목적은 더 합리적인 노동과정의 조직화, 즉 계획과 실행의 분리를 통하여 시간절약을 목적으로 하였다. 네덜란드의 학자인 니란드는 “테일러의 이상적인 계획은 단지 노동자의 노동시간 통제 이상의 무엇을 포함한다. 이는 과학적 방식을 조직, 행정, 분배 그리고 진정으로 문제 해결을 위하여 어떠한 체계적인 접근이 유익한 모든 영역에서의 적용을 포함한다”고 평가하였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테일러주의적 조직원칙은 노동자에게서 노동실행의 제반 조건에 대한 스스로의 책임감을 찬탈하여 경영자의 계획영역으로의 이전을 결과하였다.
이러한 노동과정의 변화는 경영자들에게 기업과 공장에서 새로운 지위를 부여하였다. 공장주(자본가)들이 독점적 소유에 기반 하여 노동시간을 일방적으로 결정 할 수 있는 공장에서는 경영자들은 자신들의 지식독점에 기초하여 노동과정으로의 진입을 정당화 할 수 있었다. 테일러주의에 기초한 공장주와 경영자들은 성과급제도, 계산가능성, 신뢰성 그리고 정확성을 통하여 노동력에 동기 부여하려는 목적을 지향하였다. 이러한 노동과정은 가장 최상의 시간의 이용를 보장하였고 노동자는 기계에 대한 직접적인 연결 없이 기계처럼 기능하도록 하게 할 수 있었다. 테일러는 생산기술의 향상이 노동시간을 단축시킬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 대하여는 별로 중요치 않게 생각하였다. 테일러는 1890년대 Simonds Rolling Mashine Company에서 노동과정에서 생산물을 최종 검사하는 여성 노동자의 노동시간이 너무 길다는 것을 인지하였다. 지나치게 긴 노동시간으로 인한 여성 노동자의 피로감이 생산력을 감소시키는 것이었다. 테일러는 이들의 노동시간을 10시간 30분에서 8시간 30분으로 2시간 단축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후, 테일러는 생산의 증가를 확인 할 수 있었다. 이러한 결과가 긍정적인 것이었지만 대부분의 테일러주의자들은 노동시간의 과학적 분석이나 또는 노동관계의 육체적 사회적 측면에는 관심이 없었다.
테일러주의의 공장조직에로의 응용의 일반화로 노동과정에서 지위를 향상한 기술자들은 공장에서의 인간적인 요소에 전혀 눈을 돌리지 않았고 1차 세계대전 전까지는 노동조합에 매우 적대적이었다. 당시에는 단지 소수의 기업가들이 임금체계에 있어서의 성과급제도가 노동시간 단축과 노동강도의 상호작용과 잘 조화될 때 자본주의적 시간의 경제가 더욱 효과적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었다.
포드주의
자동자 공장주인 헨리 포드는 노동조합의 8시간 노동을 요구하는 구호가 생산성의 향상에, 즉 자본에게도 유용하다는 사실을 일찍 깨달은 몇 안 되는 자본가의 하나였다. 포드는 자신이 경영하는 공장설치의 기술적 혁신을 관철시키기 위해서는 노동자들의 정신적 각오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였다. 1914년 포드는 자신의 공장에서 실행되던 9시간 근무를 8시간 교대제로 바꾸었다. 동시에 일급이 2.3달러에서 5달로 인상되었다(하루 9시간 작동하던 공장이 8시간 교대제로 인하여 16시간으로 증가). 하지만 포드가 취한 일련의 조치는 노동자를 인간적으로 위하고자 하는 박애주의가 아니었다. 포드는 1922년 자신이 취한 조치들이 생산원가를 줄이기 위하여 지금까지 취해진 방법 중 가장 좋은 것이라고 고백하였다. 포드의 목적은 자신의 공장에 컨베이어 벨트를 도입하는 것이었다. 컨베이어 벨트 생산방식은 노동자에게 지루하고 싫증나는 단순한 노동동작, 무자비한 규율과 훈련을 요구하였고 공장 노동자들을 공장 가동 시간과, 기계의 연속성과 율동에 종속되도록 강제하였다. 테일러주의와 포드주의의 가장 커다란 차이는, 이제 경영자가 공장의 계획과 이에 기반한 공장 내의 협력 관계가 어떠한지를 노동자에게 직접 설명 할 필요성이 없어지고, 경영자의 역할을 자본가의 명령을 받은 기술ᄌ다에 의하여 조작된 컨베이어 벨트가 이어 받았다는데 있다. 이제 공장에서의 집단적인 노동은 완벽하게 컨베이어 벨트를 작동하는 시계와 노동의 동시조작에 따라 진행되었다. 수공업자들이 완전히 개인적인 작업율동, 즉 주체적으로 노동시간과 구조를 정할 수 있던 반면에, 이제 많은 개개 노동자와 여러 조직들이 단지 시계를 통하여야만 보장될 수 있는 객관적이고, 모두에게 동시에 적용되는 시간이 필수적이 되었다. 노동자의 행동은 이제 시간적으로 통제되었고. 이리하여 개별 노동자는 공장조직 전체의 한 부분으로 질서 지워 질 때만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이제 개별노동자가 무엇을 해야할 것뿐만 아니라 어떻게. 언제, 그리고 어떤 시점에서 주어진 업무를 수행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 위로부터 주어지게 되었다. 포드주의의 확산으로 자본주의 공장 생산양식의 새로운 단계로써 기술적이고 관료제적 통제가 발전되었다.
포드주의의 전 세계적 확산은 산업분야에서 새로운 시간배열이 전개된 같은 시점에서 가능하였다. 말하자면, 사회적 그리고 기업과 공장에서의 분업이 확산되고 노동시간 단축을 위한 투쟁이 노동영역과 노동력 재생산을 위한 여가영역간의 시간적 공간적 분리를 강화하였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일차 세계대전 후의 8시간 노동의 법제화는 이러한 분리과정의 절정이었다. 거의 모든 유럽국가에서 공장 노동자에게 적용되는 8시간 노동이 동시에 도입되었다. 단지 영국과 미국에서는 하루 8시간 노동이 노동과 자본간의 단체협약 사항으로 확정되었다. 단체협상의 대상에 노동시간의 단축뿐만 아니라 노동시간의 길이와 형식, 즉 언제 개개 노동자의 작업의 시작과 휴식 등을 결정하는 것이 포함되기 시작하였다. 노동시간 전반에 대한 사항을 노자간의 단체협상을 통하여 결정하는 것과 표준노동시간의 도입의 대가로 노동은 자본이 일방적으로 도입한 테일러주의와 포드주의적, 말하자면 비인간적이고, 노동자를 단지 하나의 생신도구로 파악하는 생산방식에 동의하였다.
개별 노동자에게 할당된 공장과 사무실에서 실행되는 표준노동시간에서의 노동강도에 대한 결정권은 경영층(자본가 자신이던 고용된 경영자이던 간에)에게 넘어갔다. 경영층의 지위상승은 생산조직과 생산과정에서의 노동자의 지위를 현저하게 축소하였다. 경영자는 노동자를 가장 효율적으로 배치하고 사용하는 원료와 동일한 생산요소로 파악하였다. 경영자가 자신들의 지위를 향상하고 작업장에서 자신들의 권력을 공고히 한 반면에 노동시간의 구조(작업과 휴식 교육시간 등등)는 위에서 일방적으로 결정하는 계획의 문제로 되었다. 이리하여 이상적인 생산과정은 공장 설비를 100% 가동하도록 계획 하에 각각의 노동자에게 동일하게 배분된 노동시간 동안에 표준화된 상품을 대량으로 생산하는 기계화되고 총체적으로 조직된 공장이 되었다. 이러한 생산과정의 전 사회적 관철은 “노동의 기간, 한계 그리고 휴식을 군대에서처럼 일률적으로 규제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였고.... 근대 생산양식의 자연법칙처럼 되었다(마르크스, 자본론 1. 작업일 부분)”.
대공장 정규직의 노동시간을 단체협약을 통하여 48시간에서 40시간으로 단축하려는 1950년대의 논의도 이러한 “자연법칙화”된 노동시간의 구조를 거의 변화시키지 못하였다. 독일노동총연맹이 노동절 행사의 핵심구호로 주 5일 근무와 주 40시간 노동시간 채택한 1954년 이전에는 독일 산업노동자의 실제 노동시간은 주 평균 48.3시간으로 유럽에서 제일 길었다. 하지만 1954년 이전에 독일에서는 많은 자본가들이 “수익성”에 기초하여 이미 주 5일 근무제를 도입하였다. 즉 생산과정에 새롭게 도입된 기술수준이 노동시간을 단축하는 것이 이윤을 높일 수 있도록 향상되었기 때문이었다. 독일의 노조는 사회 정치적으로 주 5일제 근무, 주 노동시간 단축을 요구하고 노동자를 선동하는 적절한 시점이 왔음을 인지하였다. 일부 자본가들은 산업분야별로 통일된, 말하자면 산업별로 표준화되어 제어되는 단축된 노동시간에 찬성하였다. 이 당시 독일 자본가들은 노동자 조직의 힘이 강하였고 상당한 호황기였기 때문에 회사별로 노동시간 단축에 대한 논의가 진행될 경우 노동시간 단축이 급속하게 진행될 것을 우려하였기 때문이다. 노동시간 단축이 관통된 또 다른 원인은 지나치게 긴 노동시간이 노동자의 육체적 정신적 건강을 해쳐 노동 결손일을 줄일 수 있다는데 있었다. 1960년경 유럽의 주요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주 5일 근무가 점차로 도입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전 사회적으로 관철된 노동시간 단축은 새로운 기술개발을 유도하였다.
(이 자료는 3회에 걸쳐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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