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영 / 김호중 위원장님의 아내
2006년 10월 13일 남편이 주탑에서 내려왔다. 서울 광진 경찰서 조사 후 오랫동안 구속되리라 예상했던 그가 그날 저녁 집으로 귀가했다. 놀라움은 기쁨으로, 기쁨은 긴장의 해소로 이어졌다. 오랜만에 한 외식 후 탈이 나서 이틀 동안 배앓이를 하고 15일에 1인 시위를 섰다.
10차선이 넘게 보이는 대로를 사이에 두고 고등검찰청과 대검찰청이 나뉘어져있었고 '오발탄'이라는 요리집이 굽어보였다. 지나가는 행인이 호기심 있게 나의 1인 시위를 쳐다보고 갔다. 가끔가다 배가 싸르르 아파오기 시작했다.
남편의 고공농성이 끝났음에도 이것을 하는 배경에는 공안탄압이 끝나지 않았기도 하지만 나에게도 세상을 향해 하고 싶은 얘기가 있기 때문이다.
지금으로부터 8년 전. 결혼한 지 5년이 되던 해. 남편과 나는 두 사람의 협의 하에 헤어지려 했던 적이 있다.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란 나에게 건설노동자의 아내역할은 너무나 거칠고 불안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남편은 IMF가 터진 바로 그 해 노조 상근자가 되겠다고 선언했다. 그것은 돈을 벌지 않겠다는 것과 같은 의미였고 내가 생계를 유지해야한다는 뜻이었다.
그 당시에 아이 돌반지를 팔아 순두부 포장마차를 한 적도 있었지만 신통치 않았다. 여하튼 우리의 이혼을 막아준 것은 네살된 선영이의 힘이 컸다. 이혼을 해도 가시밭길과 같은 여자의 일생, 아이를 위해 다시 한 번 잘 살아 보자는 나의 2000년대의 시작은 쉽지 않았다.
열평 짜리 아파트에서 저소득 자녀 혜택을 받으며, 일단 자존심을 버리니 뭐든지 할 수 있는 힘이 생기기 시작했다. 어린이집을 반액으로 다닐 수 있었고 빠듯한 남편의 수입에 무엇이라도 해서 그 빈 공간을 메꿔야 했다. 여성노동자회의 도움을 받아 방과후 교사를 하며 새벽엔 건물청소와 화장실청소도 해보았다. 계약이 끝나면 냉면집 써빙도 했었는데 물냉면의 육수가 워낙 많아 나를 때면 정말 넘어지지 않을까 조심해야했던 아찔한 기억이 난다.
별달리 사무직 기술도 없는 내가 박박 우겨서 7급공무원 사무보조도 해보고 눈물나는 KT 비정규직을 거쳐 사지마비 환자 목욕시키는 재가케어복지원까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해보았다. 그렇게 해도 항상 시댁에서는 변변한 큰아들 노릇 한번 못해봤고 장인 장모에게 번듯한 용돈 한번 드릴 수 없는 형편이었다.
나는 아이 아빠가 월급으로 얼마를 타는지 모른다.
얼마를 알면 속이 타므로 일부러 묻지 않는다. 재정 관리도 그가 한다. 내가 벌어도 그에게 다주고 나는 일주마다 5만원씩 타서 쓴지 꽤 오래 되었다. 나는 그렇게 20와 30대 초반을 우울하게 보냈다. 아이 운동회나 집안제사, 심지어 이사나 내가 입원을 해도 나 혼자 다녀오고 해결한다. 남편에겐 함께할 동지들이 있고 그들의 찬사가 있을지 모르지만 나에겐 아이의 투정과 동지의 죽음, 집안 어른들의 혹독한 질타가 있을 뿐이었다.
그래도 그와 사는데 나를 지지해주는 실낱같은 희망은 음지를 양지로 만들어내려는 남편과 건설노동자들의 가련한 이상이 있기 때문이다. 긍정적인 희망으로 곰삭힌 나의 슬픔과 건설노조의 정당한 활동에 대해 세상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알았으면 하는 심정에서 대검찰청 앞 1인시위는 나에게 의미가 참 크다.
김종상 / 노동자의 힘 회원
따사로운 햇살이 마치 봄날 같다. 어제 마신 술기운 때문인지 기분이 별로 좋지 않다. 우울한 기분을 지우지 못하고 1인 시위용품을 보관하고 있는 민변사무실을 찾았다. 그동안 참여한 이들의 이름표가 그대로 붙여져 있고, 시기가 지난 올림픽대교 고공농성 사진이 붙어 있는 시위용품.
나는 너덜너덜하기까지 한 이 1인 시위용품을 갖고 세상 사람들을 만나러 간다. 크고 작은 투쟁을 앞두고 언제나 그랬듯이 짧은 명상시간을 가졌다. “나는 지금 건설노동조합을 탄압하는 국가권력을 상대로 시위를 하러 가고 있다” “나는 지금 사람들에게 건설노동자에 대한 공안 탄압을 알리려 한다” “설사 지나는 사람들이 관심을 갖지 않는다 해도 애써 알려야 한다.”
미리 짐작했던 것처럼 검찰청 앞은 사람들의 오고감이 거의 없었고, 검찰청 경비아저씨만 사진 한 장 달랑 찍어 간다.
나는 안다. 작은 돌멩이의 외침이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켜 가는지. 나는 듣고 있다. 앞서간 열사들이 일어나 싸우라고 외치고 있는 것을. 예전 같으면 구호도 외치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아 두려 했겠지만 오늘은 온화한 미소를 지으려 애썼다. 무심히 지나가는 사람들이 이 낡은 선전판을 꼼꼼히 읽어주길 바랬나보다. 여전히 우울한 기분이다. 하지만 이런 기분과는 달리 우리가 해야 할일이 있다는 것을 주문처럼 외우며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짧은 1인 시위를 그런 마음으로 했다.
권은영
과거에 그토록 절실하게 들었던 이야기들을 내가 잊고 지내고 있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낄 수 있었던 시위였습니다. 2004년에 대학생 신분으로 건설 노동자 분들을 찾아뵙고 함께 선전전을 하고 이야기를 나누었던 기억이 부끄러우리만큼 저는 많은 것들을 제 삶과 구분하고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손이 닿지 않은 공간이 없듯이 그들이 이 사회의 곳곳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나도 또한 한 부분으로 살아가고 있고 결국 그들과 나의 자리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잊고 있었습니다.
건설 노동자들의 정당한 활동에 대해 검찰이 노동조합의 싹까지 다 뽑아버리려고 하는 정책에 부딪힌다는 것은 정말이지 상식적으로 화가 날 수밖에 없는 사실이었습니다. 검찰은 건설 노동자들의 현실을 조금이라도 알기는 하는 것인지, 정말 되묻고 싶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건설 노동자들이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환경도 조성되어 있지 않은 일터에서 일하고 있으며, 산재와 죽음의 고비를 하루 하루 어떻게 넘기고 있는지, 자기 자신을 노동자로서가 아닌 하루살이 일꾼으로 여기면서 소외되고 있는지를 말입니다.
인간이 소외되는 사회에서 그들과 나의 자리가 결코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따라서 이번 시위는 제가 저의 자리에서 그들의 자리로 걸어가는 길을 생각하게 되는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그 길을 걸어 나가서 다시 만나게 될 것을 확신합니다.
이승민 / 민주노총 법률원
복마전같은 건설 현장에서 최소한의 노동권과 인권마저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것이 이 땅 건설노동자들의 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부당한 현실을 바꿔보고자 땀흘려온 건설노동조합이야말로 이 땅의 부패한 권력자들에겐 눈에 가시였을 것입니다. 노조활동을 ‘공갈·협박’으로 몰아붙이는 것이야말로 검찰이 부패 권력의 하수인임을 자인하는 것입니다.
건설노조에 대한 탄압은 민주노조운동 전체에 대한 공격일뿐더러 이 땅의 모든 고통받는 노동자들에 대한 공격일 것입니다. 모진 탄압 속에서 가열차게 싸우고 있는 건설노동자들과 함께 민주노총 법률원도 끝까지 함께 하겠습니다.
건설노조공안탄압 분쇄 릴레이 1인시위는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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