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2003년도 세계 여성의 날 기념 토론회 [노무현 정권의 신자유주의 전략과 여성 - 빈곤과 차별의 확산]에서 나온 발제문입니다.
"여성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게 하는 것은 글로벌시장에서 기업이 해야 할 절대명제이다." - 제너럴 모터스 존 스미스 회장 -
"코닥의 많은 고객은 여성이다. 여성 고객이 많다면 고객의 눈을 통해 세상을 볼 수 있고 고객집단과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는 여성 인력을 고용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 코닥 전직 회장 겸 CEO, 조지 피셔 -
지난 10월, 한 여성단체가 주최한 토론회에 노동부 고용평등국 신명 국장이 내놓은 토론문 앞뒷면에는 위풍당당한 문체로 위와 같은 글귀가 붙어 있다. 우리 사회 전반적인 노동정책을 주관하는 노동부 국장의 토론문 앞뒤에 이같은 글이 인용구로 적혀있는 것은 신명 국장의 개인적인 여성노동정책에 관한 신념을 드러내는 것임과 동시에 김대중 정권의 여성노동정책 관점의 반영이라 볼 수 있다.
1990년대 중반부터 세계은행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의 세계화를 추진하는 가운데 "여성에 대한 투자는 사회정의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발전전략의 중요한 일부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하며 각 국에 여성인력 활용의 적극적인 확대를 권장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기반하여 자국의 체질을 개선하고 있는 개별 국가들은 이러한 전략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특히 아시아 지역의 경우 보다 값싸고 꼼꼼한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노동집약적 다국적 기업들의 진출이 활발히 진행되며 여성노동력에 대한 선호도 꾸준히 증가해왔다. 발전전략 하의 여성인력 활용은 우리 사회에도 1970년대이래 지속적으로 실행되어 왔다. 하지만 여성에 대한 성차별적 시각은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격으로 경제의 부흥과 쇠락에 따라 노동시장에서의 여성의 입지를 좌지우지했다. 가장 최근에는 1997년 경제위기 이후 여성에 대한 노동시장 대거 퇴출이 이러한 사회적 경향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었다. 그리고 뒤이은 불안정노동자층으로 여성노동력을 다시금 재진입시키는 전략이 이어지고 있다. 그러므로 DJ 정권에서부터 현 노무현 정권으로 맥을 잇는 여성인력 활용 방안은 비록 성주류화 전략의 일환으로 제출되었지만 사실상은 신자유주의적 개혁의 정치·경제·사회적 맥락이 있음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여성인력 활용에 초점을 맞춘 여성정책들이 나오고 있음에도 노동시장에서 여성에게 주어지는 일자리는 임시직, 일용직, 파트타임직 등의 불안정 노동 형태임에 변화가 없고, 여성고학력 인력의 실업은 날로 늘어가고 있는 현실이다. 이같은 현실에도 불구하고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은 "여성친화적"이거나 "양성평등적"인 정책을 했거나, 혹은 앞으로 할 것이라는 기대를 받고 있다. 물론 김대중 정권이(노무현 정권은 향후 지켜봐야 할 것이고) 여러 여성정책을 펼친 점은 과거 어느 정권에 비해 실로 괄목할만한 것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리고 정책의 목표로 성주류화 관점(Gender Mainstreaming)이 제기된 것도 의미있는 부분임에는 분명하다. 하지만 아래에서 살펴보겠지만 성주류화는 전시효과적 선언의 경향이 강할 뿐 실제적인 정책의 집행은 알맹이 없이 진행되었다. 특히 여성노동에 대한 정책은 신자유주의적 노동시장 유연화 전략에 종속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다른 여성관련 정책에서 보인 성과에도 불구하고 환호만 할 수는 없다. 또한 현재 여성의 노동시장 진출이 97년 경제위기 이후 다시 회복세로 돌아섰다고 해도 그 목적의 불순함과 여성노동자의 현실에 기반해 볼 때 결코 긍정적인 평가로 귀결될 수는 없다.
이 글에서는 김대중 ·노무현 양 정권의 신자유주의적 개혁 구도 속에서 진행되는 여성정책, 특히 여성노동에 관한 정책과 여성복지 정책 등을 중심으로 여성정책의 성주류화 기조가 이 두 정책에서 어떻게 왜곡·변질되고 있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Ⅰ. 김대중·노무현 여성정책의 이념적 배경
Ⅰ-1. 양 정권의 신자유주의적 속성과 여성정책의 변화
지난 5년 동안의 김대중 정권의 활약상(?)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경제위기 상황에서 IMF의 권고를 따라 파괴적 구조조정을 통해 신자유주의 개혁을 달성했다는 것이다. 이로서 김대중 정권 5년 동안 'IMF위기 극복'이라는 명제의 달성은 한국사회를 초민족적 투기금융자본의 입맛에 맞는 '자본유치형 국가'로 바꾸어 놓았고, 사회적으로는 노동의 불안정화, 계급·계층간의 빈부 격차 확대, 특히 사회적 약자층인 여성의 빈곤 심화 등을 야기시켰다.
김대중 정권의 신자유주의 구조개혁이 진행되던 초기, 여성들은 위기에 처한 노동시장에서 사회적 불안의 안전판 역할을 강요당하며 일차적으로 노동시장에서 퇴출당했다. 그러나 김대중 정권의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에 따른 구조조정은 노동시장 유연화 전략을 단행하며 여성들을 불안정노동자층으로 대거 흡수하기 시작했으며, 그 결과 현재 여성들의 노동시장 진출은 다시금 증가 추세로 돌아서고 있다. 물론 여성들의 취업률 증가 현상은 여성들 스스로의 요구에 의한 것이기도 하다. 꾸준한 여성운동의 결과로 여성들의 의식이 향상되어오며 많은 여성들이 더 이상 부양받는 존재로 자신을 규정하려는 사회적 고정관념으로부터 벗어나 있다. 한편으로 노동의 불안정화 경향에 따라 가계소득이 감소하고, 구조조정으로 필수적인 사회서비스 관련 예산이 삭감되어 가계유지 비용이 급증함에 따라, 여성의 노동시장 진출은 부족한 가계 소득을 보충하기 위한 노동자 가족의 전략으로 중요하게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여성의 노동시장 진출이 늘었다고 하더라도 자본의 요구가 없었다면 남성 생계부양자 이데올로기가 강력하게 작동하는 한국적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의 진입이 결코 녹록한 일은 아니다. 결과적으로 현재의 여성 노동력의 노동시장으로의 유인은 경제의 금융화와 서비스화를 특질로 하는 현재의 경제발전 방향 속에서 제기되는 자본의 요구가 크게 작용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자본의 요구에 부흥하며 신자유주의적 개혁을 단행해온 김대중 정권이 여성에 대한 성주류화 전략을 어느 정도 궤도에 올려놓은 것은 단순히 친여성적 정권, 혹은 양성평등 사회 실현을 위한 정치실현으로 보기에는 여러 혐의점이 노정되고 있다.
김대중 정권이 자본유치형 국가로 남한을 탈바꿈하기 위해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단행했다면, 노무현 정권의 핵심적 과제는 대규모의 외국인투자유치이다. 노무현은 당선이 확정된 다음날 내·외신 기자회견을 통해 "국내 노동인력 중 비정규직 비율이 56%가 넘는 점은 시정해야 하지만 강력한 노동조합이 버티고 있어 정리해고가 어려운 대규모 사업장은 타협을 통해 노동 유연성을 높일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였다. 이는 선거전 당시 애매모호한 수사로 얼버무리던 자신의 신자유주의적 경향을 보다 확연히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노무현 정권은 향후 김대중 정권과 동일한 기조 위에 구조조정을 지속하되 신자유주의 개혁을 지탱하기 위한 사회적 조건 구축에 좀더 많은 관심을 기울일 것으로 보인다. 그는 한국 경제의 기본 틀도 유지하되 노사관계에도 지속적인 개혁을 추진할 것이란 입장을 밝히며 OECD등이 권고했던 이른바 '글로벌 스탠더드'와 사회적 합의주의에 다가가겠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런데 그가 말하는 글로벌 스탠더드란 무엇인가? 이것은 이제까지의 신자유주의적 개혁이 재벌개혁을 결여하고 있었다는 것에 천착하여 신자유주의 세계화·금융화를 위한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 낼 수 있도록 재벌을 투명하게 하고 이를 통해 보다 확고한 신자유주의 체제를 확립하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회적 합의주의로 포장한 노동관련 정책들은 향후 노동의 불안정화를 더욱 확대 강화하려는 전략을 감추기 위한 외피에 불과하다. "강력한 노동조합이 버티고 있어 정리해고가 어려운 대규모 사업장은 타협을 통해 노동 유연성을 높일 필요가 있다"라는 노무현의 발언은 정규직에 대한 공격을 멈추지 않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비정규직에 대한 보호'를 강화한다는 것은 비정규직 확대·제도화·노동조건의 하향평준화를 좀더 저항없이 관철시키기 위한 외피에 불과하며, 비정규직을 '합법적·제도적으로 활성화'하겠다는 것이다.
노무현의 신자유주의적 개혁 성향은 선거 기간 동안 향후 신자유주의 정책의 핵심인 외자유치 및 동북아 물류기지 확보를 목적으로 하는 경제자유구역에 대해 "설치는 필요하지만 노동권이나 환경, 의료, 교육부문 등에서 문제가 될 수 있으므로 재검토하겠다"고 공약했던 것에서 입장 선회하고 있는데서 더욱 명백히 확인되고 있다. 그는 이미 "의료와 교육을 외국에 개방하고 노사분규가 일어나지 않도록 특별히 배려하겠다"고 선언하고 있다. 외자유치를 통해 경제를 활성화한다는 경제특구법안은 실제로 공장을 설립하는 등 생산설비를 마련하는 것이 아니라, 초국적 금융자본의 투기행위에 불과한 것으로 예견되고 있다. 그러나 노무현 정권은 외국인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남한의 기술개발과 산업의 특화, 경제 인프라 구축, 평준화 해소와 교육 개혁 등을 중심으로 개편할 것으로 보이며, 극도의 노동유연화 공간을 열어주어 향후 노동 불안정화를 더욱 부추길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두드러진 특징은 유연한 노동력으로 인식되는 여성인력 활용이 경제특구에서는 물론 전 영역에서 확대 강화될 것으로 보여진다. 경제특구 법안은 경제특구 내에서는 근기준법상 월차유급휴가 및 생리휴가, 파견근로자보호등에 관한 법률상의 파견기간 등을 적용하지 않도록 규정하고 있어 향후 여성노동자의 노동권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 분명하다.
이와 같은 저간을 둘러볼 때, 여성인력 활용 차원의 여성인적 자원개발 등의 성주류화전략에 관한 양 정권의 정책에 엄중한 비판이 제기 되어야 할 것이다. 얼마 전 새 내각에는 여성장관이 과거에 전례없이 무려 4명이나 등용되었고, 청와대를 비롯한 여러 국정영역에 여성이 등용되고 있다. 또한 김대중 정권부터 시작된 "가정과 직장의 양립을 위한 인프라 구축"등의 정책은 정권이 어떠한 의도로 행하든, 오랫동안 사회에서 배제되거나 사회적 노동시장에 진입해도 가사 및 양육이 오로지 여성의 책임선을 떠나지 않았던 현실에 사회적 분담에 대한 문제의식을 던져주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측면이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명백한 것은 공적 영역에 접근할 수 있도록 개별 여성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부여함으로써 여성들의 지위를 개선하는 것만으로 성평등한 사회, 혹은 여성의 세력화(empowerment)를 이룰 수는 없다는 점이다. 더욱이 현재의 성주류화 전략에 따른 여성기용은 걸음마 단계이며 남성중심 사회의 상징적 의미인 토크이즘(Tokenism)적 경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노동시장에서의 '구조적인 불평등'을 간과하고, 단순히 여성을 노동시장으로 유인하는 것이 여성의 힘을 강화하고 평등을 이루는 조건이 될 것이라는 신화(神話)를 유포한다는 점에서 위험한 가치를 재생산하고 있다.
현재의 '시장'이 결코 젠더 중립적(gender-neutral)인 공간이 아님을 상기할 때, 작금의 여성정책에 대한 보다 정교한 분석과 비판이 요구된다.
Ⅰ-2. DJ·노무현 정권의 여성정책의 본질
살펴본 바와 같이 김대중과 노무현 양대 정권은 공적 영역에 접근할 수 없는 개별 여성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부여하는 등 성 주류화(gender mainstreaming)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했듯이 여성인력 활용을 위한 '가사노동과 직장생활의 양립을 위한 인프라 구축'은 여성들의 요구에 앞서, 유연한 노동력 확보를 위한 자본의 사활적인 과제로서 도출된 측면이 더 강하다. 그러므로 '노동시장에서의 남녀고용 차별 근절', '출산-양육에 대한 사회적 지원'은 이제 더 이상 여성들만의 요구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리고 이와 같은 전략을 신자유주의적 정권들이 실행하게 되는 배경에 세계적인 여성정책의 조류¹와 더불어 신자유주의 발전 전략²의 일환으로 도출되어진 측면을 봐야 할 것이다.
1970년대부터 UN을 중심으로 한 세계여성대회와 UN여성차별철폐협약 등의 국제적 규범이 글로벌 스탠더드로 형성되면서 여성에 대한 차별 척결 및 성평등 사회 달성의 세계적인 인식이 확산되었다. 특히 성주류화 전략이 여성정책의 기본적 접근으로 자리 잡아가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된 것은 1995년 베이징에서 개최된 제4차 UN 세계여성회의였다. 베이징 대회는 "사람 중심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조건으로서 남녀간의 평등에 근거한 새로운 동반자관계를 추구할 것"을 공식 선언하며, 이를 위한 행동강령(일명 '북경행동강령'으로 칭해짐)으로 젠더 주류화 전략을 공식 채택하였다. 이 강령 이전까지 성평등 전략은 여성의 불평등한 지위를 정치, 경제 등 공적 영역에서 여성이 배제된 결과라고 보고, 여성들을 공적 영역에 통합하기 위한 법과 제도의 개혁 및 태도 변화를 강조하는 접근법(Women in Development, 이하 WID접근으로 표기), 여성에 대한 복지를 향상시키는 접근법 등이 핵심이었다. 특히 후자의 접근법은 여성이 생산에 참여하고 있는 순간에도 여성을 생산자라기보다는 어머니, 어머니가 될 사람으로 간주하며 재생산 역할을 더 효과적으로 수행하도록 하는 복지적인 지원과 노동시장 진입의 길을 열어주는 것을 중심으로 했다. 복지지원은 생산자와 재생산자의 이중부담을 다소간 덜어줄 순 있을지언정, 가족 내 불평등한 성별 분업, 이러한 성별분업이 사회적 생산공간으로 이어지는 것을 막진 못했다. WID접근도 불평등한 젠더 관계를 간과하고 이것의 원인을 개별 여성에게 전가하며 생산활동에만 국한된 '진입' 그 자체를 위한 여성인력활용 전략에 초점을 둘 뿐, 여성에게 부과된 재생산 활동을 간과하고 갔다.
1980년대 많은 발전도상국들이 실시한 구조조정 정책이 구조조정의 부정적 영향들을 여성에게 전가시키고, 복지 후퇴를 통해 여성의 가정내 재생산노동을 강화시키는 상황이 야기되자, 여성의 생산노동 참여만을 강조하던 WID접근은 한계를 노정하게 된다. 이후 열린 베이징 대회는 발전과정에서 불평등한 젠더관계를 수정해야 한다는 GAD(gender & Development) 접근법의 문제제기를 적극 수용하여 성평등이라는 궁극적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전략으로 성주류화를 제출하게 된다. 하지만 베이징대회가 주목한 점이 성평등 관점만은 아니었다. 아래에서 자세히 다루겠지만, 1990년대 중반 세계은행은 남녀평등증진이 결과적으로 경제적 효율성을 제고한다고 발표한 바 있으며, 베이징 대회에서 행해진 각국의 정책보고에서도 남녀불평등은 사회의 생산성을 제한하고 경제성장률을 저하시키므로 남녀평등은 효율성을 높이는 '공익전략'(필자강조)이라고 강조되었다.
어떤 변수가 더욱 크게 작용하였건 간에 여성정책이 WID 접근에서 불평등한 구조자체를 문제시하는 GAD 접근으로 이동했다는 긍정적 평가에도 불구하고, 국제기구들과 개별 국가들은 여성정책의 관점에서 여전히 WID 접근을 지배적으로 유지하고 있다. WID 접근의 근거에도 국제경쟁력 제고 차원에서 여성노동력을 강조하는 것일 뿐 그것이 곧바로 평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현재의 세계경제체제는 여성을 개인으로서 노동력 제공자로 인식할 뿐, 여성의 집단적 영향력은 오히려 무시하려 하고 있다. 개별 국가들의 이러한 관점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를 확대·강화하는 세계금융기구들의 입장과 맥이 닿아 있다.
젠더 평등 관점을 수립하도록 하는 또하나의 요인은 인적자본에 대한 관심의 증가이다. 1980년대에 실시된 구조조정이 초래한 재생산의 위기에 대한 일정 정도의 자각, 그리고 인적자본의 중요성에 고려되어지며 "생산성을 증대하고 더욱 효율적인 자원 사용을 촉진함으로써 경제발전을 가속화하기 위한 전략으로 '여성에 대한 투자(investing in women)'가 중요하다는 입장들이 제출되었고, 이를 빠르게 흡수한 세계은행은 "여성에 대한 투자는 사회정의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발전전략의 중요한 일부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한다.(World Bank, 1995) 세계은행은 또한 "남성과 여성 사이의 지속적인 불평등이 사회의 생산성을 제약하고, 결국 발전과정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에, 젠더 평등을 촉진하여 그에 따라 경제적 효율성을 제고하는 전략들을 추구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며 각 국에 성평등 관점의 정책 수립을 권고했다.
성평등을 인적자본이나 효율성에 근거짓는 입장은 기본적으로 여성의 생산적 역할을 고려하지 못한 실패를 '자원의 비효율적인 사용'에만 한정짓는다. 효용의 극대화를 위한 합리적 선택으로서 성 평등의 추구는 성차를 극복하기보다는 다시금 성차를 합리적인 경제행위자들의 자유로운 선택의 결과로 귀결시킨다.
어쨌거나 여성들에게 있어 고용기회의 확대는 잠재적으로 사회와 가정 내 여성의 협상력을 증가시킬 수 있으며 그 결과 여성을 종속하는 제도와 과정의 변화에 기여할 수 있는 긍정적인 측면이 존재한다. 하지만 여성이 노동시장에 진출을 한다고 하더라도 여성은 가구 내에서의 종속적인 지위를 작업장으로 가져가는 현재와 같은 상황은 노동시장에 진입하는 여성들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아졌음에도 불구하고 성별 직종 분리를 계속 유지시키고 있다. 결국 성주류화 전략이 여성의 일, 피부양자라는 여성의 지위에 대한 사회 규범들에 대한 도전과 변화추구가 없이는 시장 영역에서 남성영역과 여성영역을 창출하고 그것을 통해 형성된 젠더 위계를 허무는데는 기여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현재 정권이 추진하는 성주류화 전략에 비판을 제기하는 것은 여성들의 종속을 만드는 이념과 제도적 구조, 과정을 수정하려는 노력에 앞서 개인만을 강조하며 여성과 남성이 결과적으로 동일하다는 가정에 기반하여 생산적 자원에의 접근만을 고무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생산을 '상품생산'과 '노동인구의 사회적 재생산'으로 분리하고 있는데 이 과정에서 여성은 노동시장 외부에서 수행되는 무임금 재생산 노동을 일차적으로 담당하는 위치를 부여받는다. 성주류화 전략이 90년대 중반이후부터 추진되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여성의 노동시장 진출은 '출산-양육을 비롯한 가족 구성원을 보살피는 노동'에 대한 1차적인 책임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에는 변화가 없다.(적어도 우리 사회에는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특히 여성관련 복지정책은 이와 같은 성향을 여실히 보여준다.(이는 복지정책에서 다시 언급하겠다)
다시 한번 확인하건대, 김대중과 노무현 정권은 성주류화라는 세계적인 여성정책의 보다 적극적이고 공세적인 기조를 신자유주의적 개편과정 속에 잘 통합함으로써 여성친화적이며 성평등한 정책을 추진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각종 여성관련 정책들을 펼치고 있으나 근본적으로 한국사회 성별 분업과 노동에서의 성별 위계, 여성의 저임금 불안정 노동화 경향, 여전히 재생산의 일차적 책임자로서의 여성의 지위 등에 대한 궁극적인 변화를 외면하고, 유연한 노동력으로서의 여성의 노동시장 진입에 걸림돌이 되는 것에 한해 수정하는 정책을 펼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성주류화가 여성정책의 핵심으로 자리잡게된 데에 정권의 의도성을 분석하는 것이 여성운동과 여성들의 투쟁의 성과, 그리고 이러한 과정속의 여성의식의 향상 등을 폄하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현재의 성주류화 정책의 수립 및 사회적인 성인지적·양성평등적 사고의 향상은 1970년대부터 부상한 페미니즘 운동의 기여를 무시할 수 없다. 페미니스트들은 단지 작업장뿐 아니라 공적·사적 생활영역 모두에서 남녀 불평등이라는 쟁점을 제출하는데 기여했다. 그러나 최근에 각각의 민족국가들과 국제기구들에서 성주류화가 제도화되기 시작한 것은 단순히 전세계적인 여성운동의 성과로 돌릴 수 없는 신자유주의로의 세계경제의 재편의 영향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은 항시 현재의 정책 비판의 관점에서 강조되어야 할 지점이다.
동등한 노동기회를 부여하는 여성인력활용을 위한 여성정책이 단기적으로는 기업에 비용지출을 늘리겠지만, 장기적으로 노동시장의 비공식화·불안정화를 통해 양성의 하향평준화를 가져올 수 있으므로 자본의 입장에서도 결코 불리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동등한 노동기회 부여에 주로 초점을 맞추어 성차별적 지침들을 폐기하는 성평등 전략은 결코 신자유주의 기획과 모순되지 않는다 지점이 있음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점들로 성주류화전략 자체를 문제삼아서는 안된다. 그것보다는 성주류화 전략을 자본의 이해에 종속시키려는 국가적 기획에 저항하고 성 불평등의 구조적 모순을 철폐하는 전술들을 포괄하는 보다 급진적이고 실천적인 성주류화 전략이 제기되어야 한다. 성주류화가 자본과 정권의 입맛에 맞게 조작되는 것을 막기 위해 여성저항주체들의 보다 광범위한 세력화, 조직화와 더불어 여성적 사고에 기반한 저항의 조직이 따라야 할 것이다.
Ⅱ. 현 여성정책을 통해 본 성주류화 전략의 본질과 한계
앞서 살펴 본 것처럼 국민의 정부(김대중)에서 참여정부(노무현)로 이어지는 현재의 여성정책은 성주류화(gender mainstreaming) 전략이라는 외피 속에 신자유주의적인 노동유연화를 위한 여성인력의 전략적 활용 측면이 담겨있다. 이 장에서는 '여성인력 효율적인 활용' 방안으로 도출된 여성노동과 복지 정책을 중심으로 양 정권의 신자유주의적 속성과 정책의지가 궁극적으로 성평등에 닿아 있지 않음을 보이고자 한다.
Ⅱ-1. 여성인력 활용방안으로서의 남녀고용평등 정책
2002년 12월 여성부가 제출한 '제 2차 여성정책기본계획'(2003~2008)은 '건전한 가정의 구현과 국가 및 사회발전에 남녀가 공동으로 참여하고 책임을 분담하는 사회시스템 구축'을 기본 정책목표로 하며 '남녀 평등, 여성의 사회참여 확대, 여성의 복지증진'을 추진한다고 밝히고 있다. 그 내용의 핵심은 직장과 가정의 양립을 위한 사회적 인프라 구축, 여성인력의 효율적 활용을 위한 여성과 남성의 조화로운 관계형성으로 집약될 수 있다. 이것을 중심으로 평가 분석해보고자 하는 것은 현 노무현 정권이 선거 당시 제출하고 또 현재 진행하려는 여성정책도 이와 유사하기 때문이다.
남녀고용평등과 여성의 경제활동참여 제고
여성 노동력의 노동시장으로의 유인은 경제의 금융화와 서비스화를 특질로 하는 현재의 경제발전 방향 속에서 제기되는 자본의 요구이다. 특히 산업구조의 재편과 (여성친화적이라고 일컬어지는)여성집중 직종의 증가, 출산율 저하 및 노령인구의 증가에 따른 경제활동인구의 감소로 여성인적 자원의 적극적 활용이 점점 중요 요건이 되어 가고 있다. 이러한 조건에서 여성들의 출산과 육아에 따른 부담을 사회가 분담하고 가족부양 서비스를 지원함으로서 여성들이 직장과 가정생활을 조화롭게 병행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 여성들의 결혼 및 출산기피 현상을 줄이고 적극적 사회참여를 유도하겠다는 것이 '직장과 가정의 양립을 위한 사회적 인프라 구축, 여성인력의 효율적 활용'의 내용이다.
여성인력 활용은 크게 두 축으로 이분화되어 진행된다. 높은 노동생산성을 위한 고급-엘리트 여성인력과 광범위한 불안정 노동집단(pool)으로서 기혼여성 노동력(특히 전업주부는 인적자원개발의 중요한 집단으로 인식된다)의 활용이다.
먼저 여성인적자원의 개발과 활용 정책에서 여성정보화 능력 제고, 고학력 여성인력의 활용, 주부 인적자원의 개발 및 활용, 공공부문에 여성참여 확대 등은 교수, 대기업 직원, 공무원 등과 같은 제한된 범위의 상위 계층 여성들에 초점이 맞추어진 정책이다. 구체적 사업에서 살펴보면, 정부 출연·투자기관의 경우 직원채용·승진 때 가산점을 부여하거나 채용, 승진 등이 극히 낮은 직군, 직종에 대해 우선 목표제를 실시하고, 모집인원 중 일정비율을 여성 응시자에게 부여하는 여성고용 할당제를 실시하고, 또한 25개 과학기술계 정부출연연구기관의 신규여성 연구원 채용비율을 2010년까지 20%까지 달성할 수 있도록 채용목표제를 실시토록 유도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사이버 여성 IT전문교육의 경우는 대도시 중심으로 일정정도의 IT능력을 가진 여성들이 주된 대상이 되고 있고, 여성과학인력의 채용목표제나 여교수 채용확대, 민간 대기업 여성관리자 양성, 여성국제인턴 선발 및 국제기구 파견근무 지원, 중산층 및 서민 생활의 안정을 위한 재취업 교육 등은 이미 일정정도의 지위와 안정적 생활수준을 가진 이들의 권익 확대를 위한 것이다. 이러한 사안들이 사회적 성차별 관행 및 관념의 해체에 기여하는 측면은 분명히 존재하나, 여성노둉력을 이분화함으로써 여성간의 계급적 분절화를 꾀하는 전략의 의미가 크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전반적인 여성의 삶의 질 개선이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더욱 문제적인 것은 집행력 부분이다.
여성고용구조의 주요 특징 중의 또 하나는 특정 직종 '여성 집중 현상'과 '여성의 비정규직화'이다. 일반적으로 여성의 연령별 경제활동참가율은 결혼 및 자녀출산기인 20~30대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이 낮아져 그 형태가 M-type을 보이게 된다. 그러나 1980년 이후 여성의 경제활동인구(15~59)의 연령별 분포는 점차 M에서 역 U자형으로 변화하고 있다. 여성의 경제활동 및 참가의 증가를 보여주는 지표이다. 이는 산업구조가 제조업 중심에서 3차 서비스 산업 중심으로 대규모 팽창하고 있는 것에 기인한다. 3차 산업의 팽창은 서비스업은 여성에게 적합하다는 인식이 더해져 여성의 고용확대로 이어지고 있다. 3차 서비스 업종의 고용은 주로 시간제 고용이나 임시 고용 형태로 이루어진다. 심지어 새로 창출된 제조업 직종의 경우에도 전일제 직업을 시간제 직업으로 전환하고 이를 통해 (기혼)여성을 흡수하려 하고 있다. 노동의 여성화-노동의 불안정화 사회에서 (기혼)여성의 활용·고용은 증가하고 있으며 자본주의의 발전전략에 따라 계속 증가할 것이다.
문제는 어떤 고용이 어떻게 확대되는가에 있다. 영육아보육시설의 확대와 육아휴직제도활성화 모성보호비용의 사회화와 여성고용으로 인한 기업부담완화, 탄력적 근무시간제와 대안적 고용형태 개발, 고용안정센터 내에 시간제근로를 특화해 알선할 수 있도록 전담창구를 마련하고 지역단위에서 육아와 근로의 병행이 가능한 여성친화적 시간제 근로의 풀을 확보해 구인을 연계해 준다는 것이다. 이미 IMF이후 파트타이머, 특수고용 등 다양한 고용 형태가 발생하고 있다. 이제 정부는 여성부와 함께 노동-가정과 직장의 양립이란 기치 하에 불안정 노동을 강제하는 고용형태를 개발하고 추진하겠다고 공공연히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 고용의 형태와 더불어 내용도 문제가 된다. 인수위에 보낸 여성연합의 여성정책 제안서는 여성일자리 창출에서 주로 지역 사회 복지, 공공서비스 분야의 전문 직종 개발 및 대폭 지원을 통한 고용시스템 안정화, 재가 복지서비스도우미 확대, 장애 노인 여성 아동을 위한 지역 복지시설 확충을 통해 복지분야 고용확대, 지역 보육시설 확충을 통한 보육 분야 고용 확대를 제안하고 있다. 가족 안에서 여성의 역할에 대한 변화추구보다는 사회적 재상산 분담을 통해 해결하려는 경향은 노동시장에서 여성의 지위를 부차적인 것에 두는 성별 노동분업 구조자체을 계속 유지 강화하는 문제로 남는다. 노무현 정권의 여성정책은 '저임금- 불안정 노동의 확산'과 '출생률 저하라는 노동인구 재생산의 위기'라는 배경으로 확인할 수 있듯이, 성별 노동분업을 무너뜨리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기보다는 '재생산의 일차적 책임자이자 신자유주의가 요구하는 유연한 노동력'으로서 여성인력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것을 초점에 두고 있다. 이미 신규 고용은 대다수 서비스 산업에서 진행되고 있으며 확대시키려는 고용의 내용 또한 가사 일의 연장선에서 이루어진다. 구조조정 이후 여성의 불안정 노동화와 더불어 진행되어온 불안정 노동의 여성 직종화와 성별분업이 지속적으로 유지될 것으로 예상된다.
모성보호, 직장과 가정의 양립을 위한 인프라 구축
기혼 여성인력을 활용하기 위해 중요해지는 것이 바로 여성에게 과도하게 집중되어 있는 가사 및 출산양육 등 가족에 대한 책임을 직장과 가정의 양립을 가능하도록 사회적 기반을 조성하는 것이다. 모성보호와 보육의 사회화는 당장에 여성의 사회참여를 유도할 뿐만 아니라 이후 현재의 출산율 저하 경향에 대한 대책으로 인식되며 노무현 정권에서도 사회적 인프라를 지속적으로 확대할 계획임을 표방하고 있다.
가정과 직장의 양립을 위한 인프라 구축의 차원에서 2000년 모성보호법이 개정되었다. 그러나 그 혜택은 여성노동자, 그 중에서도 고용보험에 들어있는 40% 미만에게만 한정된다. 심지어 노동법 개악과정에서 모성보호 미명 하에 여성에 대한 최소한의 보호규정이 철폐되었다. 이는 다시 대다수 취약한 여성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국가는 가족을 통제, 조절함으로써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가족의 능력을 지속시키고자 한다. 때문에 보육, 모성휴가와 같은 정책은 여성노동력을 저임금과 불안정 노동자층으로 노동시장에 유인하기 위해 필수적인 국가적 기획이 될 수밖에 없다. '휴직 제도'와 '서비스의 종류 확대'를 골자로 하는 출산 및 보육의 사회적 지원 체계 역시, 이에 대한 여성의 일차적인 책임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사회적 통념 극복을 위한 캠페인으로 여성부는 5대 생활문화개선 등의 의식고양 사업들을 펼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여성의 억압적 공간으로서의 가정 및 가족에 대한 전복적 사고의 부재는 가족내 역할의 공유차원에 머무르고 있음으로 그 한계가 명확하다.
노무현 정부가 내세우고 있는 양성평등정책이 가족 내에서 그리고 노동시장에서 여성의 부차적인 지위, 불안정 노동의 여성화를 넘어서려는 전략이 부재하는 한, 개인과 가족의 생존전략은 현재의 성별 노동분업 구조를 재생산하게 되며, 이 속에서 여성들이 부딪치고 있는 딜레마를 해결하는 것은 요원하다. 현재 자본주의의 생산과 재생산이 조직되는 방식에 대한 공격 없이 단순히 성차별을 문제삼는 것은 노동시장 진출에 있어서, 그리고 재생산 노동을 분담하는 방식에 있어서 여성들이 자신의 선택과 기호를 반영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환상을 강화시킬 뿐이다.
Ⅱ-2. 복지정책 : 생산적 복지에서 참여복지로 계승된 한계점들
전세계가 세계화 과정에서 여성의 복지가 축소했던 추세에 반해 우리 사회에서는 김대중 정권의 출현과 함께 여성에 대한 복지가 일정부분 향상된 측면이 존재한다. 이전의 정부가 여성복지서비스를 요보호 여성이나 취약계층 여성에 집중했던 점과 비교해 본다면 여성의 돌봄노동, 가사노동 등에 대한 사회화라는 사회복지적 접근은 중요한 진전이 측면이 있다. 하지만 이것은 또한 여성을 가족성원을 돌보고 보호하는 존재라고 보는 사회적 관행을 고착시킬 우려가 있다. 그런데 보다 근본적인 DJ정권의 복지정책의 문제점은 '생산적 복지'라는 복지정책 기조에 있다. DJ의 '생산적 복지'는 결국 복지에 대한 국가의 지출을 줄이고, 노동시장에 참여할 것을 조건으로 수혜의 범위를 한정하는 것이었다. 생산적 복지에서 전제로 하는 인간상은 '취업노동을 하는 자'이며 이는 가정의 일이 우선적인 임무로 부과된 여성 혹은 노동시장에 참여하기 힘든 장애인, 어린이, 노인 등과 같은 취약계층은 소외시키는 복지 개념이다. 생산적 복지와 같은 복지의 축소는 여성들에게 재생산 노동의 책임을 더욱 떠맡기고 있으며, 노동자의 삶의 질의 하락 속에서 가계 소득의 부족분을 메우기 위해 저임금의 불안정노동자층으로 다시금 임금노동에 진입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렇게 이중의 부담을 떠 안을 때에만 여성들은 비로소 생산적 복지의 수혜자 범위에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새로이 출범한 노무현 대통령은 참여복지를 주창하고 있다. 그러나 참여복지는 생산적 복지의 미비한 점을 보완하는 수준(생산적 복지의 리모델링)에서 유지될 것이라고 한다. '사회안전망 확충'이란 배제된 자들의 불만 관리를 위해 하향평준화된 복지서비스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정부의 역할을 생존권적 수준까지의 기초적 보장에 한정하고, 노동력재생산의 사회화는 국가복지의 확대가 아니라 시장에서의 상품화를 통해서 실현하는 것이다. 기초법 등을 통해서 극빈층의 여성을 최소한 수준으로 관리하고, 대다수 다른 여성정책들은 중산층 기혼 여성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그나마 이것들도 모두 시장화를 통해서 이루어질 계획이다. 출산과 양육을 둘러싸고 가계가 부담해야 할 비용이 급등했음에도 이것이 시장영역으로 떠넘겨지고, 다른 한 편으로 여성들에게 부과되는 '출산-양육'과 '생계보조자로서 노동시장에 참여'라는 이중적인 역할이 여성 스스로가 감내할 수 없을 정도에 이르고 있다.
성주류화 전략을 통한 성 평등 사회를 만들겠다는 기치를 들고 나온 여성부는 이러한 여성의 근본적인 불평등 구조의 척결을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국가의 여성인적자원활용이라는 신자유주의적 노동 기획에 제동을 거는 구실은커녕 오히려 신자유주의적 노동유연화에 여성노동력이 활용될 수 있는 인프라 구축을 집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현 여성정책이 '여성이 어떻게 노동시장 참여의 기회를 보장받을 것인가'하는 것에서는 한발자국 나아간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여성인력의 전략적 활용'이 자본의 요구로 적극 제기되고 있는 상황에서 '여성고용의 확대',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 확대'는 더 이상 급진적인 것이 될 수 없다.
Ⅲ. 글을 마치며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김대중으로부터 현재 노무현 정권까지 이어져 오는 여성정책의 성주류화 전략은 신자유주의적 기획에 종속된 것이다. 현시점의 '가정과 직장의 양립을 위한 인프라 구축'을 단순히 여성들의 요구에 부합하는 정책이거나 성평등 정책으로 볼 수 없는 것은 이것이 노동력 부족을 메우고 불안정노동자층을 대거 확보함으로써 노동의 하향평준화를 이루려는 자본의 요구에 의해 더욱 강하게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책의 이면이 여성들의 사회진출 욕구, 그리고 생계유지를 위한 노동시장 진입 욕구와 맞닿으며 여성친화적이고 성평등을 추구하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향후 노무현 정권하에서 호주제 폐지가 예상되고 있는 것 등은 여성에 대한 고정적 관념, 성차별적 인습과 관행을 바꾸는데 중요한 것이 될 것임에는 분명하다. 실제로 어떠한 제도가 나왔을 때 그것이 미칠 파장은 예상보다 훨씬 더 급진적 변화를 가져오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제도의 변화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하고 저항하는 여성들 자신의 투쟁이 조직되어야 그것이 제도로서 박제화되지 않고 우리 삶을 진정 바꿔놓을 수 있는 것이다. 특히나 보수적 가부장주의 지지자들의 전복 시도가 항상 도사리고 있는 현실, 더욱이 사회의 기득권층이 바로 그들이라는 점에서 대항주체 여성의 조직화·세력화는 더욱 절실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세계적인 여성정책의 선진국으로 꼽히는 스웨덴의 경우와 현재의 상황을 잠시 비교해보자. 스웨덴은 1970년대 노동력 부족분을 메우기 위해 여성노동력의 활용을 국가적으로 장려한 대표적인 나라이다. 여성노동력을 시장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여성의 전통적 역할을 사회화하는 정책들이 필수적으로 요구되었다. 그 결과 재생산을 둘러싼 권리들과 양육 및 보육의 권리들이 획기적으로 진일보하게 되고 이로서 여성이 살기에 가장 좋은 천국으로 비유되어지며 이들의 정책이 회자되었다. 또한 이 과정에서 국가의 기획에 포함된 의도는 아니었지만 여성들의 의식 수준이 높아짐으로써 여타 다른 여성정책들, 국가 공공정책들이 성인지적(gender perspective) 관점에서 수정되었다. 하지만 국가주도의 정책 추진은 성별분업이라는 구조적 불평등 요인을 제거하는 데는 크게 성과를 이루지 못했다. 결국 전세계적인 불황이 전개되기 시작하자 스웨덴의 여성친화적인 정책들은 일차적인 축소·폐지의 대상이 되었으며 점차 진보적 성향들이 폐기되고 있다.
스웨덴의 사례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의 지점은 그것이 여성들의 주체적인 세력화의 부재라는 점이다. 여성들이 조직화되어 있거나(스웨덴의 경우 여성조직들은 대체로 관에 의한 조직화는 되어있다), 혹는 여성운동, 사회운동이 구조적 불평등을 문제시하고 그것의 척결을 위해 노력했다면 오랜 기간 동안 이루어온 성평등 전략들이 쉽사리 후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현재 남한사회에 일고 있는 여성정책의 붐이 단순히 붐으로 끝나지 않기 위해서는 여성들의 주체적인 저항주체 형성이 절실히 요구된다. 그래서 현재의 성주류화 정책, 여성인력활용정책 등이 성별분업에 의한 여성차별을 은폐하고, 노동시장의 성불평등을 단순히 여성 개개인의 문제로 남겨두며 본질은 가려두고 자본의 이해에 종속된 노동력 활용책이라는 것을 밝혀야 할 것이다. 또한 어렵사리 생긴 여성부와 같은 조직이 진정한 성평등 사회를 위한 정책생산기구로서의 제역할을 하지 못하고 신자유주의적 국가 기획에 동원되는 것을 견제해야 할 것이다. 여성에게 부여되는 사회적 지위와 역할 속에서 여성이 처한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 여성들이 자신의 요구를 조직하고 발언할 때에 여성 자신의 요구를 급진화 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될 수 있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여성운동, 여성저항주체의 조직화가 절실히 요구된다.
90년대 중후반부터 여성활동가들을 중심으로 남한 사회운동의 가부장성과 성차별적 관행들이 문제제기 되기 시작했다. 또한 운동의 내용에서 성평등을 다른 사회운동 이슈에 부문으로 인식하며 전체 사회운동의 필요에 따라 전략적으로 활용하려는 경향들에 비판이 제기되었다. 개선의 노력들이 간헐적으로 보이긴 했지만 여전히 이러한 활동 작풍은 지속되고 있다. 기존의 노동조합 운동은 여성노동자의 비중이 높아지고 있는 상황에서도 여성들의 요구를 부차화시키고, 이들을 적극적으로 조직하는 역할을 자임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가 하면, 여성에게 이중의 부담을 부과하는 '가족을 기반으로 하는 생존전략'에 호응하고 있어 빈곤의 여성화, 불안정 노동의 여성화를 중단시키기 위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신자유주의적 기획 속에서 여성 노동력을 활용하고, 노동시장의 비공식화·불안정화를 통해 양성의 하향평준화를 가져와 장기적으로 자본에 이익이 되게 하려는 신자유주의적 정권에 전면 대응하는 데 한계를 노정할 것이다. 90년대 이래 꾸준히 증가해온 여성노동의 비정규직화에 침묵해 오던 사회운동 및 노동운동 진영이 경제위기 이후 남성노동시장의 유연화에 직면하여 이 문제를 제기하고, 이 과정에 특히 여성을 중심으로 노동력을 비정규직화 함으로써 노동위계화, 성별위계화를 이끌어 여성과 남성의 대립구도를 유도하려는 자본의 의도에 그대로 노출되어 갔던 사례들을 상기해보라. 그러한 남성적 협상의 결과는 결국 자본의 신자유주의적 노동유연화에 대한 정면 대항에서 비껴간 것이며, 결과적으로 자신들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뿐이다.
이러한 점에서 여성적 요구와 관점을 '전체'라는 말속에 가둬버리고 부문화시키는 과거는 반드시 극복되어야 한다. 여성의 문제를 특수한 문제로 여기는 인식을 넘어 여성적 사고에 기반한 전체운동에 대한 관점과 계획 수립은 사회운동의 성편향적 사고와 관행을 넘어서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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