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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새로운 사회를 향한 작은 균열

:: 2009-08-18   조회: 2454

곱/씹/어/볼/만/한/이/야/기




이 글은 질라라비 65호의 무엇이 그(/그녀)를 미치게 만들었을까라는 글을 보고 편집위원회에서 논의하여 '그/녀'라는 단어를 정확하게 쓰고, 알고 쓰자는 의미로 글을 싣게 되었습니다.



#1. ‘그’대신 ‘그/녀’라고 쓰기

‘그’라는 낱말 대신 ‘그/녀’라는 말을 쓰게 된 것은 언제부터일까. 내 기억으로는 2000년대 초반, 한창 ‘여성주의’담론이 활발하던 때 즈음이었던 것 같다. 그때 우스갯소리로 이런 이야기가 오고가기도 했다.

모든 인간[남성]men은 죽는다.
소크라테스는 인간[남성]이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죽는다.                        
그러나..
모든 인간[남성]은 죽는다.                        
앨리스는_
‘앨리스’뒤에는 무슨 말이 들어갈까? “앨리스는 인간[남성]이다”라고 할 수는 없다. 앨리스는 여자니까.
그러므로..
앨리스는 죽기도 하고 죽지 않기도 하는 이상한 입장에 처하게 된다. 즉 앨리스를 여자로 간주하면 앞의 삼단 논법식의 추론을 할 수 없다. 소크라테스는 삼단논법을 무너뜨리지 않고서도 인간man으로 간주될 수 있었지만 앨리스를 여자로 생각할 경우 삼단 논법은 성립되지 않는다. 추론은 흔들린다. 삼단논법의 중심에 인간man이 있지만 그 중심은 보편적이지도 중립적이지도 않은 배타적인 것이다. 앨리스는 거울 속으로 사라진다.




#2. 무엇을 위해?

‘그’ 대신 ‘그/녀’라고 바꿔서 쓰는 데에 그토록 열심이었던 까닭은 기존의 규범, 즉 ‘남성’이 ‘보편’이 되던 기존의 질서에 균열을 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라는 낱말 자체에 남성과 여성이 모두 포함되는 것일텐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느냐는 이야기도 있었다. 물론 ‘문법적으로’ 봤을 때, ‘그’가 ‘남성’만 일컫고, ‘인간(man)'이 남성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그/녀‘는 문법적으로 옳지 않은 쓰기방식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세상은‘ 엄연히도 ’남성‘을 기준으로 돌아가고 있는 걸! 남자아이가 태어나면 축복받는다. 여자아이가 태어나면(무사히 태어날 수 있다면!) 다음에 또 낳으면 된다고 한다. 주민번호 1번은 남성이다. 여성은 2번이다. ’남녀사이‘라는 말은 있어도 ’여남사이‘라는 말은 없다. (’한글‘프로그램에서도 ’여남사이‘에는 붉은 밑줄(맞춤법이 틀렸다는 의미)이 그어진다) 제약회사에서 신약개발을 할 때 표준은 누구인가...
우리는 이러한 현실이 갑갑했다. 숨이 막혔다. 그래서 작은 구멍이라도 내고 싶었다. 그래서 새로운 시도를 꾀했다. 여성과 남성이 서로 억압적인 방식이 아니라 우애로운 방식으로 새롭게 관계맺을 수 있는 실험을 가로막는 모든 공고한 규범들에 균열을 내기 위해, ‘그’ 대신 ‘그/녀’라고 썼고, ‘남녀사이’ 대신 ‘여남사이’라고 말했으며, ‘형제’대신 ‘동지’라고 노래가사를 바꿔부르기 시작했다.


#3. 지구반대편에서도 시도되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유행’

이러한 유행은 알고 보니 우리만 시도하는 것은 아니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베네수엘라에서도 성구분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새로운 문법이 개발되고 있었다.

베네수엘라의 아이들L@s Niñ@s,
미래의 혁명가들L@s Revolucionari@s


“L@s Niñ@s은 아이들이라는 뜻의 스페인어 입니다. 로아스 니뇨아스라고 읽습니다. 본래 '아이들'이라고 할 때에는 Los Niños(로스 니뇨스)라고 해야 공식적인 문법에 맞지만, o 대신 @를 사용한 것은 사람을 통칭할 때 남성, 여성을 구별하고, 특히 양성이 섞인 집단을 가리킬때는 항상 '남성 복수'를 사용하던 것을 바꿔보려는 이곳 젊은이들의 유행을 따라 한 것입니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유행이 아닌가 싶어서요.
즉, 이 단어는 Los Niños(로스 니뇨스, 남자 아이들 혹은 아이들), Las Niñas(라스 니냐스, 여자 아이들)를 하나로 합친 것입니다. '로아스 니뇨아스'라고 읽습니다. 최근의 유행이기 때문에 사전이나 책에는 안 나와 있습니다. 물론 젊은이들도 그냥 남자 아이들을 가리킬 때는 Los Niños을 사용하며 여자 아이들을 가리킬 때도 마찬가지로 Las Niñas를 사용합니다. 성별 구분이 없는 '아이들'이라는 집단을 가리킬 때만 저 골뱅이가 들어간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L@s Revolucionari@s (로아스 레볼루시오나리오아스, 혁명가들)처럼 모든 사람 집단에 적용됩니다. 즉, 지금 여기 젊은이들은 사람을 부를 때 성구분을 무력화하는 새로운 문법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 사진 속의 아이들도 언젠가는 이 빈민가의 어른들처럼 현재 진행되는 혁명의 주체로 성장해 나가겠지요. 그들의 시대에는 이 땅에 더 이상 빈민가가 남아있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2005년 06월 19일 진보넷 블로그 中
http://blog.jinbo.net/neoscrum/?m=2005-06#more_anchor241)


#4. ‘그/녀’가 가져온 작은 균열, 그 이후는?

이제는 운동사회 내에서는 어쩌면 조금은 당연하게 ‘그/녀’라는 말이 쓰이고 있기도 하다. 그 ‘당연함’ 속에 ‘그’라는 낱말을 굳이 ‘그/녀’라고 바꿔서 쓰곤 했던 처음의 문제의식이 희미해지고 있기도 하지만, 어쨌거나 ‘작은 균열’이 열린 것 같기도 하다. 자, 이제 균열이 났다면, 그 이후는 뭘 해야 할까? 이제는 또 다른 ‘정치적으로 올바른 유행’을 개발해야 하는 때일지도 모르겠다.

(p.s. 질라라비 66호 [비정규직과 문화]꼭지에 실렸던 김성만 씨의 ‘욕에 대해서’를 읽고서...

억압받는 사람들일수록 ‘욕’은 필요하다는 김성만 동지의 의견, 옳소~! 부르주아의 매너와 교양 따위 저리가라지! 우리는 열받는 일이 많기 때문에 욕할 일도 많다! ^^


그러나 고민되는 것은 ‘어떠한 욕’인가? 그것이 또다시 우리 내부의 차이를 차별로 만들게 된다면, 그 욕은 우리를 속 씨원하게 만들어주는 욕이 될 리 만무하다. 그런 욕은 결코 억압받는 민중들을 위한 욕이 아니다. 장애를 비하하고, 여성의 성을 대상화하고, 어리다고 깔보고...그런 욕이 아니라 다른 욕, 좀 없나? 욕을 하려면, 우리 안에서 누가 다른 누구를 짓밟고 서서
                    

그것으로 얕은 희열감을 느끼는 그런 욕, 즉 오히려 우리가 피해받는 욕 말고, 정말 욕해줘야 할 인간들에게 씨원하게 내지를 수 있는 그런 욕을 해야 하지 않을까? ‘정치적으로 올바른 유행’의 바람이 ‘욕 문화’에도 좀 불어주길 바래본다.)
문설희 |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교육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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