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가장 좋은 책이라는 코너는
딱딱한 서평을 쓰는 코너라기보다는
동지들의 삶의 밑거름이 되었던 책,
아니면 너무나 공감이 갔던 책,
마음을 후련하게 하는 책들을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한 번 쯤은 동지들과 공유하고 싶었던 책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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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맥산맥’과의 만남
내가 ‘태백산맥’을 처음 접한 때는 감옥에 있을 때였다. 2004년 말에 감옥에 들어가면서 ‘책읽기’를 가장 먼저 해야 할 일로 꼽았던 적이 있다. 무료한 시간을 달래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지만, 책 읽는 습관을 들여보자는 결심이 가장 중요한 이유였다. 그래서 나름대로 종류별로, 분야별로 탐독할 책 리스트를 만들어서 넣어달라고 사람들에게 부탁했다. 사람들이 넣어주는 책을 닥치는 대로 읽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조그만 방에 앉아서 할 일이 없었던 나는 무섭도록 책읽기에 집중했었다.
‘태백산맥’과 나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집중해서 읽었지만 감옥에 있을 때 태백산맥을 다 읽지는 못했다. 10권이나 되는 방대한 분량을, 이러저러한 다른 책과 함께 읽기에는 감옥에 있는 시간이 너무 짧았다.
감옥에서 나와서는 ‘태백산맥’에 한 동안 손을 못 대다가 군대에 가서 다시 읽기 시작했다. 역시 스트레스의 연속이었던 군생활을 달래기에 적절한 책이었고 역시 무섭도록 집중해서 읽었다. 스토리 전개도 재미있었지만, 그 책이 나에게 던져주었던 질문의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너무 매력적이었고 그 책을 읽는 동안 나는 그 답을 찾는데 미쳐있었다.
그 책을 다 읽고 나서 지금까지 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군대를 제대해서 다시 활동공간으로 돌아와 활동을 하고 있는 지금, 그 의문은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다. 그 의문이 풀리는 날, 나는 그 책 속의 주인공들처럼 살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이 글을 쓴다.
해방 직후, 찬란한 ‘꿈’을 꾸었던 ‘그(/그녀)’
‘태백산맥’의 주인공은 ‘염상진’이란 남로당 혁명가이다. 그는 전남 보성과 벌교를 근거지로 해서 해방직후부터 한국전쟁이 끝날 때까지 미제국주의와 이승만 정권에 대항해 비타협적인 빨치산 투쟁을 지도한다. 하지만 내게는 이 ‘염상진’이라는 인물이 주인공이라는 사실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물론 그는 대단히 훌륭한 혁명가였지만, 수많은 빨치산 투쟁을 했던 선배들 중의 한 사람일 뿐이었고 그 사람의 ‘역할’이 ‘지도자’였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책이 그 사람을 ‘주인공’으로 택했을 뿐이었다.
내게는 그 책에 등장하는 모든 ‘빨치산’들이 주인공이었다. 빨치산 개개인이 주인공이었다는 의미라기보다는 그들이 하나의 거대한 집단으로 형상했던 ‘빨치산’이 주인공이었다. 그들이 살아가면서 했던 고민, 살아갔던 방식 등이 서로 얽히고 설켜서 만들어진 하나의 거대한 집단, 그들의 삶 각각이 서로 충돌하고 서로 융화하는 ‘화학작용’을 거쳐 덩어리진 하나의 결정체로 형상해서 ‘빨치산’은 나에게 다가왔던 것이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나에게 주인공은 개별 사람들 혹은 개별사람들의 단순합 혹은 개별사람들의 집단이 아니고 이와는 질적으로 다른 ‘빨치산’이라는 새로운 질의 단일한 결정체이기 때문에 빨치산에 대해서 ‘그들’ 대신 ‘그(/그녀)’라는 표현을 쓰려고 한다. 이러한 나에게 태백산맥의 줄거리를 구성하고 있는 개개인간의 ‘사건’들은 모두 당시 시대의 모순과 구조를 상징적으로 드러내주기는 하지만, 솔직히 별로 의미가 없다.
해방 직후 그(/그녀)는 꿈을 꾼다. 모든 사람이 평등하고 착취가 없는 새로운 국가를 건설할 수 있다는 꿈을!! 그리고 그 꿈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여수와 순천 지역에서 무장투쟁을 일으킨다. 하지만 그 투쟁은 다소 무모하다고 생각될 만큼 준비되지 않은 봉기였다. 남한에서의 전국적인 봉기의 가능성은 고사하고 그 투쟁을 지지엄호할 기반도 제대로 갖추어지지 못한 상태에서 일어난 투쟁이었다. 북한에서는 새로운 사회 건설이 현실화되고 있었지만, 아직 남한의 조그만 지역에서 일어난 무장봉기를 지지엄호할 만큼의 실력은 갖추고 있지 못했다. 그(/그녀)도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얼마든지 적들의 탄압에 의해 고립될 수 있고 남한 전역으로 확산되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을!! 하지만 그(/그녀)는 결단했고 감행했다. 하지만 장악한 여수와 순천을 결국 사수하지 못하고 입산한다. 그(/그녀)가 꾸었던 꿈이 패배했다고 했을 법도 하지만 그(/그녀)는 입산하는 순간까지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입산이 꿈을 실현시키기 위한 새로운 단계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그(/그녀)의 꿈은 그 찬란한 빛만큼이나 그렇게 사그러들지 않고 지속된다.
‘꿈’이 ‘현실로’ 되다
그리고 그 ‘꿈’이 현실로 다가온다. 산에 들어가 빨치산 생활을 하면서부터 고난의 연속이었지만 그(/그녀)는 그 ‘꿈’을 실현시킨다. 한국전쟁이 그 꿈 실현의 계기였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 이승만 정권과 미 제국주의는 후퇴하고 후퇴하여 낙동강 유역까지 밀린다. 입산했던 빨치산이 하산해 민중들과 함께 남한 전역에 ‘인민위원회’를 건설하고 새로운 사회 건설을 위한 작업에 박차를 가한다. 그(/그녀)의 인생 중 가장 행복하고 보람된 시간이었을 것이다. 내가 꾸고 있던 꿈이 단순한 ‘공상’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안도감, 그 꿈이 내 앞에서 실현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다는 기대감, 그리고 무엇보다도 역사상 유례가 없었던 ‘만인이 평등한 사회’가 어떤 사회인지 실험해 볼 수 있다는 두근거림이 그(/그녀)를 행복한 존재로 만들었을 것이다.
‘현실’에서의 좌절과 또 다른 투쟁의 시작
하지만 미군이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하면서 그(/그녀)의 꿈은 석 달 만에 산산조각이 나고 만다. 미제국주의와 이승만 정권이 다시 실권을 장악하면서, 건설되었던 인민위원회는 산산히 무너지고 그(/그녀)와 함께 꿈을 꾸었던 민중들이 처참하게 살행당하고 감옥에 간다. 그(/그녀)도 결국 다시 ‘산’으로 돌아간다. 산에서 그(/그녀)는 북한마저 미제국주의와 이승만 정권에 의해 무너질 위기를 목도하지만 그 상황에서도 그(/그녀)는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 ‘꿈’은 더욱더 찬란한 빛을 발하며 타올랐다. 계속되는 적들의 토벌작전과 지독한 추위, 굶주림, 편안함에 대한 악랄한 유혹 속에서도 그 빛은 퇴색하지 않고 계속되었다. 함께 입산한 가족들이, 친구들이, 연인이, 동료들이 자기 눈 앞에서 죽어갈 때도 그(/그녀)는 그 빛을 발하는 방법을 잊어버리지 않았다.
결국 1953년에 휴전이 되면서 정전협정이 맺어지고 전쟁은 중단된다. 남한에 있던 그(/그녀)는 산에서 고립되고, 미제국주의와 이승만 정권의 토벌작전은 더욱더 거세진다. 하루하루 지날 때마다 토벌대의 총탄에, 굶주림에, 추위에 동료들이 하나둘씩 죽어간다, 어떤 이는 몰래 하산하여 경찰과 군대에게 정보를 제공해 동료를 팔아먹고, 어떤 이는 유혹에 견디다 못해 대열을 이탈하고, 어떤 이는 적들의 거짓선동에 속아 산에서 내려갔다가 죽임을 당한다. 주위에 동료들은 하루가 멀다하고 줄어든다. 적들의 토벌과 굶주림, 추위로 인해 24시간 내내 목숨을 걸고 있어야 하는 상황은 한국전쟁 발생 이전과 달라지지 않았지만, 주위를 둘러보면 남아있는 동료들은 거의 없었다.
그(/그녀)가 ‘미칠 수 밖에’ 없게 만들었던 꿈의 ‘찬란함’
하지만 그(/그녀)는 ‘꿈’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그 ‘꿈’을 포기하지 않은 댓가를 치루어야 했다. 그 댓가는 ‘목숨’이었다. ‘꿈’을 포기하고 ‘현실’로 돌아가면 그 돌아간 현실에서 목숨은 부지하고 살 수 있었다. 하지만 그(/그녀)에게 그 현실에서 부지되는 목숨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오히려 그 ‘꿈’이 가지고 있는 빛이 더욱더 찬란하게 영원히 타오르는 것이 중요했다. 비록 자기가 목숨을 잃어 그 빛을 더 볼 수 없게 된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그에게 있어, ‘꿈’이 가지고 있는 ‘빛’을 보지 못하면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었던 것이다.
그(/그녀)는 그 꿈의 찬란한 빛에 눈이 멀어 미칠 수 밖에 없었다. 역사상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그 ‘찬란함’ 앞에 그는 그 찬란함을 발하는 ‘꿈’의 매력에 미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꿈’의 빛을 현실에서 나오는 ‘빛’으로 만들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기에 그(/그녀)는 미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확신은 감정 혹은 의지의 산물이 아니라, 현실에서의 구체적인 조건들이 제시하는 과학적 확신이었기에 그(/그녀)는 그 미친 꿈과 목숨을 맞바꿀 수 있었던 것이다.
‘역사’속에 스러졌지만 그(/그녀)가 꾸었던 ‘꿈’은 영원하리라!!
책을 다 읽고 나는 생각해 보았다. 내가 과연 그(/그녀)가 된다면 그(/그녀)처럼 확신하고 행동할 수 있었을까? 온갖 어려움과 역경, 심지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상황까지 감수하면서 그렇게 투쟁할 수 있었을까? 내 꿈과 내 목숨을 맞바꿀 수 있었을까? 자신하지 못하겠다. 아니, 못 할 것 같다. 지금까지 ‘운동’이라는 것을 해 오면서 나는 솔직히 그 ‘꿈’의 찬란한 빛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물론 그 빛을 본다고 해도 빨치산처럼 행동할 수 있었을까에 대한 긍정적 답도 내리지 못한다. 그 빛을 보지 못했으니까.
이런 생각도 해 본다. 수많은 열사들은 그 빛을 보았기 때문에 자기 목숨과 맞바꿀 수 있었던 것일까? 전태일 열사도, 박종철 열사도, 이한열 열사도, 이용석 열사도 그 빛을 보았던 것일까? 그들은 구체적인 현실에서 그 ‘꿈’의 실현 가능성을 과학적으로 확신했던 것일까?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그 ‘꿈’이 현실화되었을 때의 모습을 ‘과학적’으로 볼 수 있었기에 그 ‘빛’이 보였다고 생각한다. 마치 빨치산처럼.
‘빨치산’은 역사 속에 스러져 갔다. ‘열사’들도 역사 속에 스러져 갔다. 그들이 꾸었던 ‘꿈’도 어찌보면 함께 스러졌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확실하다. 그들의 죽음을 먹고나서, 그 ‘꿈’이 가지고 있는 ‘빛’은 더욱더 찬란하게 영원히 타오르리라는 것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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