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0일 3개 부처와 빈부격차차별시정위원회에서 ꡐ일을 통한 빈곤탈출 지원정책ꡑ이라는 거창한 이름의 정책을 발표했을 때 반가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생활고로 인한 일가족 자살, 소녀 가장의 자살 소식이 잇따르다보니 뭔가 대책이 나오지 않으면 이 비극이 그치지 않으리라는 불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EITC제도니 하는 낯선 용어들 때문에 헛갈리기도 했지만 이번 발표 역시 ꡐ아무리 열악한 조건일지라도 참고 일하지 않으면 생존을 보장하지 않겠다ꡑ는 정책 기조에 변화가 없다고 한다. 이번 지원정책의 경우 사회보장정책을 포기하고 노동시장 정책만으로 빈곤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대담한(!) 발상을 전면화했다는 점에서 더 논란이 되고 있다. 대부분의 일자리를 비정규직이자 저임금인 불안정한 일자리로 만들면서 이런 일자리를 통해 빈곤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정권의 뻔뻔스러운 거짓말에 반대하는 투쟁이 필요하다. 경제위기가 심화되는 가운데 '수백만 실업자와 빈곤층을 생각하면 비정규직 일자리라도 감지덕지하라'는 정부, 자본의 공세를 돌파하기 위해서라도 빈곤 문제에 대한 운동진영의 공세적인 대응이 필요하다. 아래는 빈곤사회연대(준)에서 발표한 '일을 통한 빈곤탈출 지원정책 해설'을 요약 정리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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ꡐ일을 통한 빈곤탈출ꡑ지원정책(이하 ꡐ이번 정책ꡑ)의 가장 큰 문제는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리려 한다는 점이다. 역사적 투쟁을 통해 사회복지는 누구나 노동능력과 무관하게 기본적인 생활의 유지를 할 수 있는 권리로 자리잡아 왔다. 그러나 이번 정책은 인간의 권리로서 사회복지를 제공하기보다는 오히려 일을 해야만 복지를 제공하겠다는 것을 핵심주장으로 한다. 이는 사회가 발달하면서 이뤄왔던 것들을 거꾸로 돌리려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국정과제회의는 마치 전 세계적으로 ꡐ일을 통한 복지ꡑ가 대세인 것처럼 과장한다. 그러나 실제 EITC를 비롯하여 이번에 제기된 내용들은 미국을 위시한 대표적인 신자유주의 국가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이다. 역사를 거꾸로 돌리면서 마치 새로운 대세인 것처럼 허위광고를 하고 있다.
이번 정책에서 제기된 대안들은 빈민, 노동자, 민중의 대안이라 보기 어렵다. 빈곤층과 근로빈곤층이 처한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노동시장에서의 저임금과 불안정 노동이다. 따라서 이를 해결할 수 있는 근본적인 방법은 노동시장 내의 임금과 고용의 보장이다. 그러나 정부는 비정규직들이 처한 차별을 감소시킨다는 말도 안 되는 허세를 부리면서 비정규직법안 개악을 단행하고 있다. 이제 누구나 기간제 고용과 파견노동을 마음껏 사용할 수 있는 현 상황에서 노동시장 유연화가 더욱 가속화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그런데 국정과제회의는 노동시장 유연화와 비정규직 법안 개악은 남의 집 일인 양 모르는 체 하면서 강제노역을 주장하고 있다. 과연, 어디서 어떤 일을 하란 말인가?
실업률은 정체 상태인데 빈곤층이 늘어나는 까닭은?
먼저, 현재의 빈곤상황이 심각하다는 데에는 누구도 이론이 없다. 정부는 실업률이 늘어나지 않는 상태임에도 빈곤층이 줄지 않는 이유를 근로빈곤층(working poor)의 증가 탓으로 해석한다. 여기까지는 맞다. 그러나 정부는 이 근로빈곤층의 인구적 특성에 대해서는 특별한 언급이 없다. 내수불황과 중국과의 경쟁이라는 경제 환경에도 불구하고 지표실업률은 완만하게 상승했으나, 체감실업률은 오히려 감소하고 있다. 동시에 체감실업률 증가의 원인이라고 하는 경제활동인구비율은 오히려 증가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잠정적으로 내릴 수 있는 분석은, 청년층의 실업현상을 제외하고는 전반적으로 고용시장 사정은 개선되고 있는 반면에 노동조건(임금 및 고용안정성)은 악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고용불안정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그것의 양태는 일자리 개수의 감소나 ‘실업’이 아니라, 불안정노동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정부 빈곤대책의 핵심은 ‘저소득 불안정 노동’을 줄여나가는데 맞춰져야 한다. 그런데, 정부의 처방은 자신의 인식조차도 따라가지 못한다. 노동시장의 조건 때문에 빈곤이 증가한다고 분석한 뒤에 거꾸로 노동시장 상황을 악화시키는 조처들(비정규노동법 개악안 등등)을 대책으로 내놓았다. 정부 스스로도 이 같은 모순을 어느 정도 인식하고 있는 것 같다. 애당초 이 프로젝트의 명칭은 ‘일자리 창출을 통한 빈곤탈출’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빈곤의 원인이 ‘실업’이 아니라, 불안정 노동에 있는 것으로 드러난 이상, ‘일자리 창출’이 빈곤탈출의 해법이 되지 못한다는 것은 너무도 자명하다. 때문에 정부는 다소 수정해서 ꡐ일자리 창출’이 아니라, ‘일’을 통한 빈곤탈출로 바꿨다고 한다. 그러나 엎어치나 메치나 마찬가지이다. 일을 해도 빈곤하다는 근로빈곤층에게 무슨 일을 통한 빈곤탈출이란 말인가. 올바른 제목은 ‘노동시장조건 개선을 통한 빈곤탈출’이어야 한다.
복지정책 포기를 선언한 노무현 정권
보다 근본적인 문제점은 복지의 영역과 노동의 영역에 대한 최소한의 근대적 기준마저 뒤집겠다는 대담한 발상이다. 복지는 최소한의 삶을 보장하기 위한 것으로, 이런 권리는 다른 것의 조건으로 혹은 전제로 제공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정부의 이번 조처는 기본권의 개선이 아니라, 사회경제 정책을 통해 기본권을 훼손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ꡐ복지를 누릴 권리’와 ‘일할 의무’라는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에서처럼 기본권을 흥정과 반대급부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개발 독재시절의 관습을 되살리려는 행위이다.
이번 정책의 목적은 근로빈곤층에게 단순히 생계비를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근로능력이 있는 빈곤계층이 자립하여 빈곤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럴 경우에는 근로빈곤층이 노동시장의 인구집단으로 파악될 것이 아니라, 빈곤계층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기초생활보장 혜택을 받지 못하는 130만의 절대빈곤층을 수급권자로 인정하는 조처가 이루어진 뒤에, 차상위계층이라는 이름으로 복지혜택을 제한당하는 사실상의 절대빈곤층(정부 보고서에도 사실상 절대빈곤층이라고 인정하고 있다)에 대한 절대복지가 이루어진 뒤에 노동시장 정책을 운운해야 한다. 정부의 이번 정책은 빈곤대책의 대상이 되어야 할 인구집단을 마치 노동시장 대책 대상인 것처럼 호도하여 문제의 핵심을 흐리고 있다.
정작 이 문제에 대해서는 정책리포트 15쪽에 참고 표시로 “소득 이외의 수급 자격 요건을 완화하여 비수급 빈곤층을 축소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이나 본 보고에서는 다루지 않음”이라는 한마디로 지나가고 있다. 빈곤문제 해결에 있어서 핵심적인 것은 바로 이 보고서에 말하고 있지 않은 바로 이 부분, 비수급 빈곤층의 축소 문제 그리고 최저생계비의 현실화 문제이다. 정부는 기초법상의 수급권자가 절대빈곤층이라는 사실을 애써 무시하고 있다. 절대빈곤층에 대한 공공부조는 조건부가 아니라, 절대적이라는 기본적인 인식이 이 정책 어디에도 드러나 있지 않다.
* EITC제도란?
이번 정책 관련해서 언론에서는 EITC제도의 도입을 중요하게 보도하고 있다. 이 제도는 저소득층이 일을 해서 근로소득이 생길 경우 근로소득 세액을 줄여줘서 세금을 적게 걷거나 세금 자체가 너무 적을 경우 국가가 저소득층에게 돈을 주는 제도를 말한다. 그러나 이 제도는 빈곤층의 생활을 더욱더 피폐하게 할 것이다. EITC제도 하에서 빈곤층은 우선 일을 해서 소득세가 있어야만 적용받을 수 있다. 때문에 더욱더 열심히 일해야만 국가로부터 어느 정도의 혜택을 받을 수 있다. 실제 미국에서는 EITC 이후에 불안정노동자로 진입하는 층이 증대되고 있다. 미국 EITC와 TANF의 결합은 (국가가 보기에) 일할 능력이 있으면서 일하지 않는 사람을 국민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정책 방향을 표현한 것이다.
게다가 실제 한국에서 EITC는 그 효과가 미비할 것으로 예상된다. EITC제도가 그나마 효과를 거두려면 노동능력이 부족한 집단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사회보장제도가 적용돼야 한다. 하지만 한국의 기초생활보장제도는 어떠한가. 기초생활보장제도의 혜택이 필요한 집단의 극히 일부분만이 수급권을 보장받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EITC를 도입하는 것은 기초법의 생계급여를 더 이상 확대하지 않고, 노동시장의 불안정성을 그대로 용인하겠다는 정부의 의지를 표명한 것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