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을 해도 가난하다?!
비정규직의 비율이 정규직의 비율을 넘어선 것은 이미 오래전의 일이 되었다. 빈곤의 문제 역시 마찬가지이다. 얼마 전 한 취업사이트에서 진행한 조사결과, 20-30대 직장인 65.2%가 스스로를 일하는 빈곤층, 일명 ‘워킹푸어’(Working Poor)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드러났다는 사실은, 빈곤의 문제가 더 이상 일부 빈민계층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단적으로 알려준다. 일하는 사람들 10명 중 7명이 가난한 현실, 그것이 바로 2007년 한국사회의 적나라한 실상인 것이다.
이는 비단 우리나라만의 문제는 아니다. 최근 일본에서는 ‘피씨방 난민’과 ‘맥도날드 난민’이 늘어나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다고 한다. 이들은 대게 일용파견으로 일하는 노동자들이다.
왜 일을 해도 가난한가? 누구의 책임인가?
‘워킹푸어’(Working Poor)란 끊임없이 일하면서도 역설적으로 끊임없이 실업과 빈곤에 노출되는 불안정한 노동 상태에 놓인 이들을 말한다. ‘일을 하면, 돈을 벌면, 사는 게 나아지겠지’라고 대부분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많은 이들이 일을 해도 가난하다. 오히려 일을 할 수 있다는 이유로 각종 사회적 보호에서 배제된다. 높은 사교육비와 의료비 지출, 천정부지로 솟는 주택가격은 자녀들까지도 빈곤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게 발목을 잡고 있고 대를 이은 빈곤이 더욱 이들을 절망으로 내몬다. 신용불량과 사채의 덫은 이들을 더욱 깊은 수렁으로 밀어 넣는다.
왜 일을 해도 가난한가? ‘가난은 나라님도 구제하지 못 한다’라는 옛말을 읊조리기에는, 그 이유가 너무나도 명백하다. 그것은 이들이 비정규직이기 때문이다. 일을 해도 가난의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고 오히려 더욱 빈곤한 상태가 되어가는 것은, 각종 사회적 안전망에서 배제된 채 고용불안과 저임금에 시달리며 살아가야 하는 불안정한 노동현실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는 누구의 책임인가? 비정규직이 결코 능력의 부족이나 나태함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일을 해도 빈곤한 문제 역시 마찬가지로 개인에게 책임을 묻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도 ‘가난’은 ‘수치’이자 ‘무능함’으로 여겨지고 있다. 일본에서는 급식비를 체납하는 아동들이 늘어나자 “못된 엄마들이 늘어난다”고 질책하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고 한다. 또한 아르바이트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청년들이 늘어나자 “자유롭게 살고 싶어서 그런 것 아니냐”는 시선을 보내고 있다. 빈곤의 문제를 철저히도 개인의 무능과 나태, 혹은 개인의 선택에 따른 필연적인 귀결로 바라보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개인이 열심히 살아도 빈곤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은 이미 현실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또한 그 누구도 가난한 삶을 선택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점점 더 그러한 삶 이외에는 선택지가 존재하지 않게 되고 있다는 사실 역시 밝혀지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진실, 즉 빈곤은 개인의 노력이나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구조의 문제라는 사실을 이토록 철저하게 은폐시키고 있는 이는 누구인가? 진실을 은폐시키고 거짓을 퍼뜨려서 수많은 사람들을 허망한 경주에 뛰어들게 하고 결국 좌절로 이끄는 이는 누구인가? 그게 누구인지 밝히는 것은 어렵지 않다. 99%가 빈곤한 삶으로 인해 인간답게 살아갈 권리를 빼앗기는 동안, 넘치고 넘치는 특혜를 맛보느라 바쁜 1%가 누구인지를 따져보면 모든 것이 명백해진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인해, 노동의 불안정화로 인해, 빈곤의 심화로 인해, 오히려 부유해지고 더 많은 ‘명품’을 소비하게 된 이들, 바로 그들에게 우리는 책임을 물어야 한다.
빈곤에 갇힌 권리를 석방하라!
저임금과 불안정노동을 양산함으로써 빈곤을 심화시키고 노동자민중의 삶을 파탄내는 이들에게 책임을 묻자. 요구하자. 빈곤에 갇혀버린 우리의 권리를 석방하라고!
생존에 위협 속에서 전전긍긍해하며 살아야만 했던 세월을 석방하라고 외치자. 안정된 소득과 주거와 의료와 교육과 문화에 대한 권리는 마땅히 보장되어야 한다. 하루, 한 달, 일 년 정도만을 바라보며 하루살이처럼 살아야만 했던 인생을 석방하라고 외치자. 가난하기 때문에 꿈조차 꾸지 못했던 미래, 그 미래를 꿈꿀 권리는 당연히 보장되어야 한다. 빈곤하다는 이유로 주눅이 들어 좌절감을 맛보아야 했던 삶 역시 석방하라고 외치자. 인간답게 오늘을 당당하게 살아갈 권리는 누구에게나 보장되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가난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압박으로 인해 저임금의 불안정한 노동, 위험한 노동을 강요당할 수는 없다고 외치자. 빈곤을 심화시키고 삶을 파탄내는 저임금․불안정노동은 철폐되어야 한다!
되도록 여럿이 함께 외치자. 한날한시에 모여서 외치자. 2008년 10월 17일은 UN이 정한 ‘세계 빈곤 퇴치의 날’이다. 그러나 빈곤이 ‘퇴치’를 해야 할 질병과도 같은 것이라면, 현재 빈곤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은 환자인 셈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따라서 우리는 이 날을 ‘세계 빈곤 철폐의 날’로 고쳐 부르고, 빈곤을 ‘철폐’하기 위한 투쟁을 전개해야 할 것이다. 10월 17일에 한자리에 모여서 싸우자. 인간으로서, 노동자로서, 존엄하면서도 당당하게 살아갈 권리를 가두어놓은 신자유주의 세계화라는 구조를 분쇄하고 빼앗긴 우리의 권리를 되찾아오는 싸움을 벌여나가자.
빈곤문제 해결은 ‘일자리 창출’이 아니라,
‘안정된 삶의 보장’에서부터 가능하다!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야기한 빈곤에 맞서 투쟁을 하는 데에 있어, ‘저임금’, ‘불안정노동’, ‘빈곤’에 대한 대책은 없이 ‘능동적 복지’라는 화려한 수사로 대신하고 있을 뿐인 이명박 정부에게 책임을 묻는 일은 피할 수 없다. ‘일할 수 있는 사람에게는 일자리가 최고의 복지’라는 발상은 빈곤문제 해결의 의지가 없음을 증명하기 때문이며, 나아가 ‘일자리=최고의 복지’라는 등식은 오히려 문제를 심화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제한적으로나마 무료로 제공되던 가사간병서비스가 9월부터는 ‘바우처 사업’으로 전환된 사례를 예로 들어보자. 정부는‘바우처’라는 쿠폰을 이용자에게 지급하고, 이용자는 그 쿠폰을 가지고 바우처 회사에서 서비스를 ‘구매’하도록 함으로써, ‘시장을 형성’하고 ‘일자리를 창출’하여, 중․고령 여성들에게 좀 더 나은 생활을 보장해준다는 발상은, 그러나 중․고령 여성들에게 저임금의 불안정한 일자리를 강요하는 결과로 이어질 뿐이다. 저임금의 불안정한 일자리가 가난의 굴레에서 쳇바퀴 도는 삶과 직결된다고 했을 때, 일할 수 있는 사람에게 일자리를 제공함으로써 빈곤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이야기는 거짓에 불과하다. 또한 이러한 바우처 사업으로의 전환은 자기부담금을 부담할 수 없는 저소득층에게는 서비스 접근권을 차단시키는 효과를 낳는다. 쿠폰을 지급할 뿐인 정부는 서비스 이용자(=저소득층)의 불편이나 서비스 제공자(=비정규직노동자)의 불안을 책임질 하등의 필요도 없어지는 것이고.
결국 분명해지는 것은 빈곤문제 해결은 ‘일자리 창출’로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일을 하면 떡 하나 준다”는 식으로는 곤란하다. 빈곤을 심화시키는 구조와 시스템, 즉 저임금의 불안정한 노동을 양산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어떻게 저지시킬 것인가로 발상의 전환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는 이러한 발상의 전환을 가로막고 있다. 그렇다면? 답은 한 가지 뿐이다. 2MB OUT~! 일을 하면 노동자답게, 일을 하지 않더라도 인간답게, 당당하게 살 수 있는 세상, 안정된 삶이 보장되는 세상을 위해 2MB는 O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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