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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75|06|2009
자본주의 공황과 실업자운동 - 역사적 사례와 최근의 경향을 중심으로

:: 2009-08-31   조회: 3721

생존을 위한 연대가 필요하다


우리는 이러한 정권과 자본에 맞서서 이제는 대안을 이야기 해야합니다. 특히 이러한 경제위기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실업과 반실업을 반복하는 불안정노동자들의 요구를 구체화하고 이를 위한 투쟁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이번호 특집에는 정부의 이러한 정책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우리의 요구를 구체화 시켜내고, 이 요구를 가지고 투쟁을 시작하려고 하는 단위들의 이야기를 실어보려고 합니다. 또한 외국에서 진행되고 있는 실업관련 정책을 살펴보고 대안을 떠올려보고자 합니다.

이명박 정부의 일자리 정책의 허구성 | 정지현
충북 실업자대회와 조직화 관련한 취지와 의미 | 김순자
반(反)실업대회 참가기 - 공공근로 인생 | 김병기
자본의 공황과 실업자운동| 원영수
노동권실현-생존권 쟁취를 위한 우리의 요구 | 엄진령



1. 들어가며 - 공황과 실업자운동


자본주의 아래서 공황은 불가피하다. 2차대전 이후의 이른바 황금기=케인주의 시기를 제외하면 변함없는 사실이다. 1970년대 이후 본격화된 신자유주의적 전환을 통해서 공황이 재발하기 시작했고, 최근 10년은 본격적인 주기적 공황을 낳았고, 2008년 미국발 서브프라임 위기로 기화로 1930년대 이래 최대의 공황국면 초입에 들어섰다.
그 결과, 자본주의 중심부의 복지국가 체제에서 사라졌다고 믿었던 실업이 사회적 문제로 등장했고, 신자유주의적 축적체제의 보편화와 더불어 실업은 더욱 확산되고 구조화되었다. 이러한 구조적 실업에 당면한 경제공황이 가져올 대량실업이 결합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전개 되고 있다. 신자유주의의 노동배제적 메카니즘 속에서, 구조적 실업은 불가피하고 대량실업과 결합되면 그 파괴적 효과를 더욱 증대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역사를 통틀어 노동자들이 임금인상과 노동조건 개선을 위한 투쟁을 해온 것만큼, 노동으로부터 배제된 실업자들 역시 투쟁에 나섰다. 19세기의 주기적 공황에 맞선 자연발생적 실업자투쟁, 20세기 전반기 1930년대 대공황시대의 실업자 운동이 주요한 사례이다. 더불어 신자유주의적 전환이 가속화되는 1980년대 이후 새로운 실업자투쟁이 등장한 바 있다.
이 글에서는 현재까지 역사적으로 나타났던 실업자들의 투쟁과 운동, 조직에 대하여 살펴볼 것이다. 그러나 실업의 속성상 가장 조직하기 어렵다는 실업자운동에 대한 높은 관심에 비해 실질적 연구는 빈약하며, 바로 그 이유와 더불어 운동의 세대적 단절로 인해 과거의 실업자투쟁의 역사는 제대로 정리되어 있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은 주요한 실업자운동 전체를 포괄하기보다,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실업자운동의 전반적인 경향을 주요 사례 중심으로 살펴볼 것이다.
이는 역사 속의 실업자운동을 살펴봄으로써 그 성과와 한계를 인식하고, 현대의 대공황 국면에서 등장하고 있는 주기적 실업과 구조적 실업의 결합 아래서 새로운 실업자운동의 가능성을 모색하기 위한 기초작업이 될 것이다. 따라서 20세기 실업자운동에 대한 검토는 실업자운동에 대한 막연한 추상적 당위를 넘어 역사적 연속성과 단절 속에서 다음 단계의 실업자운동을 건설하기 위한 노동운동과 좌파운동의 집단적 노력에 필수적인 부분이다.
다만, 주제의 중요성에 비해 국내적으로나 국제적으로도 연구성과가 대단히 빈약하다는 점을 미리 밝혀둔다. 국내의 연구성과나 자료축적은 거의 전무하고, 국제적으로도 개별 국가/지역에 대한 일정한 연구의 존재하지만, 포괄적이고 체계적인 연구성과는 취약한 것이 현실이다. 이 글 역시 그런 한계로부터 자유롭지 못하지만, 보다 체계적인 연구를 위한 디딤돌을 놓고자, 경우에 따라 과도한 단순화와 도식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이 글을 내놓는다.


2. 1930년대 실업자운동


전사 - 19세기의 실업자투쟁
주기적 공황과 실업에 대한 자연발생적 실업자투쟁


자본주의가 유럽을 주임으로 정착했던 19세기, 특히 그 후반기는 제어되지 않는 자유무역의 결과 각국 자본주의는 주기적 공황에 직면했고, 이는 노동자계급에게 곧 주기적 실업을 의미했다. 노동조합운동이 아직 형성기에 있었고, 노동자정당운동이 본격화되지 않는 19세기
중후반 실업자들의 투쟁은 자연발생적 성격을 띄었고, 조직적 운동으로 발전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경기주기와 연동한 노동자들의 대량실업사태는 자본주의의 내적 모순을 적나라하게 폭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초기단계에 있었던 노동조합은 비록 19세기말에 이르러 보다 전국적 규모의 노동조합을 결성했음에도, 대체로 실업자들을 취업노동자를 대변하는 노동조합들에게 위험한 파업파괴자로 인식될 수밖에 없었다. 노동자정치운동 역시 아직 미분화상태였기 때문에 실업과 빈곤에 대한 인도주의적 접근을 넘어서는 조직적 시도는 산발적이거나 부분적이었다.


영국의 실업자운동


- 전사: 19세기의 실업자투쟁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에도 산발적인 수준으로 자연발생적인 실업자들의 투쟁이 있었다. 특히 주기적인 공황시기에 실업문제의 해결을 요구하는 시위가 지역수준에서 벌어졌으며, 다음과 같은 전국적 시위로 발전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 1886년 2월 런던 트라팔가 광장에서 실업자 3만 명 시위,
- 1897년 3월 13일(검은 일요일) 트라팔가 광장에서 10만 명의 실업자 시위대와 경찰과 충돌로 3명 사망
- 1905년 6월 최초의 기아행진(리세스터에서 런던),
- 11월 최대의 실업자시위 - 10만 명 하이드파크 집결


전국실업자운동(NUWM)


영국실업자운동의 대표적 조직은 전국실업자운동(National UnemployedWorkers’ Movement: NUWM)이다. 1921년 전후 공황기에 영국공산당(CPGB)의 주도로 ‘전국실업자위원회운동’(NUWCM)으로 출범했다. 20년대 경기가 안정되면서 소강국면에 들어갔다가, 1930년대 공황을 맞아 조직을 재편하여 전국적인 수준에서 실업자운동을 주도했다.
영국공산당의 월 해닝턴과 해리 맥셰인 등이 지도적 역할을 했으며, 대표적인 투쟁형태는 1922년, 1929년, 1930년, 1932년, 1934년, 1936년에 조직된 ‘전국기아행진’이었다. 특히 1932년 기아행진이 최대규모였으며, 런던에서 경찰과 충돌했다. 마지막 행진이 된 1936년의 전국기아행진에는 25만 명이 집결했다. 공산당이 주도하지 않았던 재로우 행진(1936년 10월 스코틀랜드 재로우에서 출발)도 있었다.
영국의 실업자투쟁은 크게 공황의 경제적 타격을 받았던 산업지역(이른바 재난지역Distressed Area)의 지역투쟁을 토대로, 이를 전국실업자운동으로 총괄하는 전국적 수준의 투쟁으로 확장되었고, 1930년대 중반 NUWM은 10만 명의 회원을 가진 강력한 조직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1930년대 후반 실업이 감소하고, 특히 1939년 2차대전이 일어나자 사실상 활동중지 상태에 이르렀고, 1946년에 공식적으로 해소했다.
영국의 실업자운동은 1930년대 선진국의 실업자운동 가운데 가장 조직적인 형태의 운동으로 평가 받는다. 그리고 이는 실업문제에 대해 소극적인 노동당이나 노총(TUC)의 적대적 무시에도 불구하고 영국공산당의 전투성과 헌신성에 힘입어 실업자들의 대중적 조직화를 이룩한 가장 성공적 사례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성과에도 불구하고, 공산당과 실업자운동 사이에는 일정한 긴장이 존재했으며, 특히 공산당의 노선이 이른바 코민테른 제3기(1928-35년)의 계급 대 계급 전술에서 35년 이후 인민전선 전술로 선회하는 좌충우돌 경향은 실업자운동의 대중적 확장에 장애가 되기도 했다. 그렇지만 1935년 이후에는 노총(TUC)의 ‘검은회람’(Black Circular: 1934.10.26)에도 불구하고, 지역노조들이나 노조 좌파들과 협력적 관계를 구축할 수 있었다.
1930년대 영국의 실업자운동은 거대한 노동조합과 노총에 대해 상대적으로 소수정파에 불과한 영국공산당이 주도력을 발휘하여 실업자운동을 대중운동과 대중조직의 형태로 발전시킨 성과를 거두었고, 노동조합을 넘어서는 독자적 대중운동으로 발전하는 역동성을 보여주었다.


미국: 1930년대 미국 실업자운동


1929년 월스트리트 주가폭락으로 시작된 대공황 국면에서 당시 후버정권의 소극적 실업대책에 맞서, 미국공산당(CPUSA)이 실업자 조직화에 주도적으로 나섰고, 이는 미국공산당의 역사에서 대중적 성과를 낸 시기로 기록된다. 그러나 사회당 등 다른 좌파세력이 실업자 조직화에 가담하고, 다른 한편으로 1933년 출범한 루즈벨트 정권의 뉴딜정책이 시행되면서, 실업자운동은 초기의 전투성과 활력을 상실하기 시작했다. 1935년 미국노동자동맹(WWA)의 결성으로 실업자운동의 단일한 전국적 조직화가 완성되어 전국적으로 60만 명의 회원을 갖게 되지만, 정치적으로는 실업감소와 2차대전 협력체제 하에서 소멸의 길을 걷게 되었다.
- 전사: 19세기의 실업자투쟁
미국에서도 영국과 마찬가지로 주기적 실업사태에 저항한 자연발생적 투쟁이 19세기에도 벌어졌다. 대표적인 사례는 다음과 같다.
- 1837년 필라델피아에서 실업자 2만 명 긴급구제 요구하며 시위
- 1857년 미국 주요도시에서 실업자투쟁 발생
- 1873년 뉴욕과 시카고 수만 명 실업항의 투쟁,
- 1893년 시카고 25,000명 실업반대 시위
- 1894년 콕시 실업자 워싱턴 행진(Jacob Coxey)


초기국면(1929-32년): 공산당 주도 실업자평의회 운동


대공황의 충격파 속에서 미국공산당은 1930년부터 실업자의 조직화에 착수했다. 실업자운동은 당시 윌리엄 포스터가 이끌던 노동조합통일동맹(Trade Union Unity League: TUUL)의 사업으로 시작되었고, 지역적 수준에서는 항의시위와 집회, 구호기금수령 지원, 퇴거저지투쟁(집세를 못 내서 쫓겨나는 실업자들의 강제퇴거를 물리적으로 저지하는 투쟁) 등을 통해 지역단위에서 아래로부터 실업자들을 조직하여 지역 수준에서 실업자평의회(Unemployed Council)로 조직했다.
이런 공산당의 실업자 조직화 사업의 정치적 시발점은 1930년 6월 코민테른의 지침에 따라 조직한 국제실업의 날(International Day of Unemployment) 투쟁이었다. 코민테른 창립 11주년을 맞아 선포된 국제실업의 날 투쟁(붉은 목요일)에 미국 전역에서 대규모 항의시위(뉴욕 10만, 디트로이트 10만, 시카고 5만 등)가 벌어지면서 실업문제를 전사회적으로 부각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런 정치적 성과와 아래로부터의 실업자평의회 조직화의 결실에힘입어 1930년 7월 시카고에서 전국실업자대회(National Unemployment Convention)가 소집되었고, 이 대회에 참석한 1,320명의 대의원들은 실업자들의 전국조직으로 전미실업자평의회(National Unemployment Convention)를 출범시켰다. 공산당의 실업자평의회 운동은 1931년 12월과 1932월 12월에 전국적 규모의 기아대행진을 조직하였고, 주정부나 지방정부에 맡겨진 구호를 넘어 연방정부 수준의 실업대책을 요구하는 실업보험법령 청원운동을 벌여 150만 명의 서명을 받기도 했다.


1932년 상여금 대행진(Bonus March)


실업자의 대열에는 1차대전 참전 제대군인들이 많았는데, 이들은 정부가 약속한 상여금(1945년 지급예정)을 미리 지급할 것을 요구하며 워싱턴으로 행진했다. 32년 5월초 제대군인들은 가족과 함께 수도로 집결하기 시작했고, 6월 중순경에는 2~4만여 명이 텐트촌에 집결했다.
7월 16일 법안은 하원표결(209 대 176)에서 통과했으나 7월 18일 상원에서 부결(62 대 18)되었다. 그러나 상여금 원정대는 농성해산을 거부했고, 결국 7월 26일맥아더와 패튼의 지휘 하에 육군이 탱크와 기마병을 앞세운 강제적 기습진압을 전개하여, 충돌과 텐트방화의 와중에 1명이 사망하고, 50여명이부상하여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해산 당한 실업 제대군인 1천여 명은 1934년 5월 다시 워싱턴에 집결하여 투쟁을 전개했다. 비록 상여금 지급은 쟁취하지 못했지만, 루즈벨트 정부의 공공근로 사업배당을 확보할 수 있었다.


중기국면(1932-35년): 좌파세력 간의 경쟁국면


공산당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실업자운동이 활성화되자, 실업문제에 소극적이었던 다른 좌파들도 실업자 조직화에 뛰어들었다. 대표적으로 미국사회당은 산업민주주의동맹(LID)의 주도로 노동자 실업위원회를 조직했고, 시카고의 경우 23년 중반경 60개 지부, 25,000명을 조직화 (32년중반)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한편 진보적 평화주의 목사 A. J. 머스티가 이끌었던 진보적노동행동협의회(Conference for Progressive Labor Action)도 실업자 조직화에 참여하였고, 대표적으로 실업자의 자조사업 지원을 통해 시애틀실업시민동맹(UCL)을 결성했다. 이 그룹은 미국적 토양과 문화에 근거한 실업자운동을 주창하여, 여러 지역에서 실업자동맹(Unemployed League)을 건설했다.
이렇게 좌파세력이 실업자조직화에 뛰어들면서, 실업자운동은 크게 공산당의 실업자평의회, 사회당의 실업위원회, 머스티 그룹의 실업자동맹 등 3대 세력이 경합하는 국면으로 전개되었고, 1935년 1월 사회당과 머스티 그룹의 주도로 미국노동자동맹(Workers’ Alliance of
America: WAA)이 결성되었다. 한편 인민전선 노선으로 선회한 미국공산당의 결정에 영향을 받아 실업자평의회운동이 1936년 이 흐름에 참여하면서 미국의 실업자운동은 전국적인 수준에서 단일조직으로 통합되었다. 1936년 4월에 열린 제2차 미국노동자연맹 총회에는 36개 주에서 900명의 대의원이 참석했고, 36년 말을 기준으로 WAA는 43개에 1,600개 지부, 60만 회원을 거느린 거대한 조직운동으로 발전했다.


후기국면(1935-39년); 통합, 제도화와 동력소진


미국의 실업자운동은 외형상 전국적 단일조직으로 통합했지만, 이 통합의 성과는 그리 크지 않았다. 한편에서 1933년 출범한 루즈벨트의 뉴딜체제는 대규모 공공근로사업을 통해 실업자들의 불만을 완화했고, 진보적 노사관계법으로 알려진 와그너법(Wagner Act: 전국노사관계법 NLRA)을 계기로 대대적인 산별노조 건설운동(CIO)이 벌어지면서 실업자운동은 상대적으로 부차화되는 결과를 낳았다.
특히 1935년 루즈벨트정권이 공공사업촉진청(Works Progress Administration: WPA)을 출범시킨 이후 실업자운동의 사업은 상층중심으로 연방정부로비와 입법청원운동에 집중되었고, 연방정부가 사업파트너로 인정함에 따라 조직적으로 공공근로 프로젝트의 관리에 참여하면서 실업자운동의 제도화는 더욱 가속화되었다.
특히 루즈벨트의 뉴딜연합을 중심으로 한 2차대전 참전으로 실업이 급격히 줄면서 실업자운동은 사실상 동력을 상실했고, 이미 제도화와 온건화의 길을 걷고 있던 실업자운동은 전쟁의 와중에 유명무실하게 소멸했다. 미국노동총동맹(AFL) 뿐만 아니라, 진보적 산별노조회의(CIO) 역시 전쟁중 무파업 협약에 동조하면서, 실업자운동과 산별노조 운동으로 이어지는 대공황시기의 노동운동은 역사의 장을 마감했다.


노동조합과 실업자운동, 좌파정당


직능별 조합주의(craft unionism)를 대변하는 미국노동동맹(AFL)은 노동귀족의 관료조직답게 처음부터 실업문제에 대해 냉담했으며, 심지어 실업보험에 대한 반대입장을 고수했다. 따라서 실업자운동에서 기존 노총의 역할은 사실상 없으며, 심지어 적대적이기도 했다. 그러나 반숙련-미숙련 노동자들을 조직하는 산별노조운동이 와그너법을 계기로 확산되면서 상황은 변하기 시작했다.
CIO의 주력인 자동차노조(UAW), 전기노조(UE), 철강노조조직위 (SWOC) 등은 실업자의 조직화에 적극적이었으며, 특히 자동차노조는 미시건주 웨인 카운티에서 포드조직화 투쟁은 실업자 투쟁과 적극적으로 결합했다. 이는 CIO와 주요 산별노조에서 핵심적 역할을 했던 공산당 활동가들이 강조했던 실업자와 노동자들의 단결의 원칙에 기초한 것이었다.
CIO는 1937년 이후 실업자 포괄정책을 실시했으며, 그 일환으로 실업위원회(Unemployment Committee)를 설치하여 실업자운동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였으며, 자동차노조(UAW)의 경우 실업자대책을 위한 복지부를 설치하여 실업자운동을 지원했다. 그러나 1938년 미국노동자연맹(WWA)이 CIO와 통합을 추진했을 때, CIO 위원장 존 루이스는 실업자조직의 전투적 이미지를 우려하려 양조직 통합에 반대했다.
미국공산당은 1930년대 초반부터 실업자운동을 주도했지만, 1934년 노동자파업(샌프란시코 총파업, 오토라이트 총파업, 미네아폴리스 총파업 등)의 물결이 거세지자, 사업의 중심축을 산별노조건설운동을 매개로 한 노동조합 사업에 역량을 집중하면서 상대적으로 실업자조직
화 사업은 주변화되었다. 그렇지만 실업자운동이 배출된 활동가들이 산별노조운동의 조직가와 활동가로 성장하였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다른 나라의 실업자운동


프랑스의 경우 영국이나 미국같은 전국적 조직이나 기아행진 없었지만, 역시 프랑스 공산당을 중심으로 파리지역 및 주요 실업지역 중심으로 실업자 운동을 전개했다. 노총에서 분리한 좌파노총(CGTU)를 중심으로 실업자위원회를 건설하여 실업자투쟁을 주도했다.
독일의 실업자운동은 전국실업자위원회(혁명적노동조합반대파 RGO)을 조직하여 실업자운동을 전개했으며, 실질적으로 독일공산당(KPD) 활동가들이 주도했지만 형식상 노동조합운동에 소속되었다. 지역수준에서 기아행진(1930년 5~6월, 1930년 11월 ~ 1932년 11월)을 조직했으며, 전국적으로 1931년 여름을 기준으로 1,500개 실업자위원회에 8만 명 회원이 참여하였고, 15개 실업자 신문이 485,000부를 배포했다.


총괄적 평가


미증유의 대공황과 대량실업 사태 속에서, 각국 공산당을 비롯한 좌파들의 헌신적 투쟁은 실업자운동을 대중운동으로 발전시키는 데 상당한 기여를 했다. 이 시기 공산주의운동의 오류에도 불구하고, 공산당 활동가들의 전투성과 헌신성은 실업자운동을 노동자계급운동의 새로운 영역으로 구축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 시기는 이른바 고전적 실업자운동의 시대로 규정할 수 있다. 공산당을 포함한 계급적 좌파는 실업자평의회, 실업자위원회, 실업자동맹 등의 조직형태로 실업자대중을 조직했고, 실업자행진, 강제퇴거저지투쟁, 실업급여-긴급구제 요구투쟁 등을 통해 실업을 개인의 불행이 아닌 사회적 책임의 문제로 전환시킴으로써 실업보험을 비롯한 근대적 사회복지체제의 기본요구를 제도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런 실업자운동과 대중투쟁은 2차대전의 전화 속에 묻히지 않고, 전후 케인즈주의적 복지국가의 수립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전후 냉전체제 속에서 역동적 실업자운동의 흔적은 사라졌지만, 1930년대 실업자운동의 전투성이 현대적 노동운동의 틀을 구축하고 계급타협적 복지국가체제를 광범한 사회적 합의의 토대 위에 정립하는 데 핵심적 요소 중의 하나로 작동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3. 최근의 실업자운동 (1990년대 후반 이후)


전후 자본주의의 황금기로 표현되는 케인즈주의적 축적체제 하에서 실업은 사회적 이슈에서 배제되었다. 그러나 68혁명 이후 본격화된 세계 자본주의체제의 위기와 위로부터의 계급투쟁으로서 신자유주의 공세가 전면화되면서, 사회적 지평에서 사라진 실업이 다시 사회적 이슈로 등장하기 시작했고, 1980년대에 들어서면 구조적 실업은 자본주의 중심부에서 핵심적인 사회적 이슈로 등장하게 된다.
초기 국면에서 구조적 실업은 사회복지의 지속적 축적 하에서 제도의 틀 내에서 해결하려는 시도가 노동조합과 제도정치를 중심으로 이뤄지지만, 신자유주의적 탈규제 체제 하에서 구조적 실업을 막을 수 없었고, 1999년 OECD의 추정치에 의하면 전세계적으로 3,500만의 실업자가 존재하고 서유럽의 경우도 2천만에 이르게 되고, 빈곤층도 5천만을 육박하게 된다.
이런 역사적 맥락 속에서 새로운 실업자운동이 등장하게 되는데, 서유럽에서는 프랑스의1995년 파업 이후 1997-98년 겨울 대규모 실업자운동이 등장하여 전 유럽적 운동(유로마치)으로 발전하였고, 다른 한편 주변부 자본주의에서는 신자유주의 공세 앞에서 새로운 저항의 형태로 아르헨티나의 피케테로스 운동이 새로운 실업자운동으로 주목을 받게 되었다.
프랑스 실업자 운동과 유로마치프랑스에서 구조적 실업에 대항한 실업자투쟁과 조직화는 1980년대부터 시작되었지만, 본격적인 운동은 1990년대 중반에 이뤄지고, 그 중심에는 실업에 대항하여 투쟁하라(AC!)라는 새로운 실업자운동 조직이 있었다. 물론, 80년대 이래 실업자 조직화를 위한 시도가 있었지만, 구조적 실업을 전사회적 이슈로 확장하고 실업자를 새로운 정치의 주체를 정립시킨 것은 1997-98년 겨울의 실업자 점거운동이었다.
1993년에 설립된 AC!는 반자본주의적 실업운동을 지향하였으며, 특히 구조적 실업에 대한 전유럽적 차원의 공동대응을 위하여 사회적배제와 실업에 반대하는 유로마치(Euromarch against Social Exclusion and Unemployment)를 결성했고, 유로마치는 1997년 5월 5천여
명의 활동가들이 참여한 암스테르담 행진을 조직하여 실업문제를 유럽화하는 데 성공했다. 유로마치는 네트워크 구조를 통해 전유럽서기국과 연락위원회를 통해 네트워크 구조를 연결되어 있었고, 유럽정상회담에 맞서 ‘유럽실업자의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특히, 기존의 실업대책을 넘어 사회적 생활임금 요구를 제기하였다. (이후 유로마치는 반세계화운동의 급속한 진전에 따라 유럽사회포럼운동의 네트워크 속으로 편입된 것으로 보인다.)
1997-98년 실업자운동은 마르세이유 CGT 실업자위원회가 조스팽 정권하에서 축소되는 실업기금에 항의하여 ‘성탄절 보너스’를 요구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투쟁은 곧 AC!와 MNCP, CGT 실업자위원회, Apeis 등 4대 실업자운동단체와 CGT, CFDT 좌파, G10(Groupe des
Dix, SUD 노조 주도) 등 좌파노조블록의 전국적 연대체 결성을 매개로 전국적 투쟁으로 확산되었다. 특히 성탄절 보너스 요구가 묵살되자 1월초 전국적으로 실업보험관리공단의 사무실을 점거하면 투쟁을 더욱 부각시켰다. 그 결과 이 실업자투쟁은 여론의 70% 이상의 지지를 받는 대중적 투쟁으로 발전했다.
1월 7일 시작된 점거투쟁이 전국의 40여개 사무소 점거로 확산되자 당황한 조스팽정부는 한편으로 대화와 개혁정책을 발표했지만, 1월 10일 경찰력을 동원하여 점거농성을 강제해산 시켰다. 하지만 실업자단체들은 물러서지 않고 1월 13일 투쟁을 재개하였고, 그 이후 1월 17일과 3월 7일 두 차례에 걸쳐 전국실업투쟁의 날을 조직하였다.
1997-98년 프랑스의 실업자운동은 1930년대의 이른바 고전적 실업자운동과는 다른 정치사회적 조건에서 전개된 것으로, 구조적 실업초기국면에서 노동조합 중심의 제도적 대응의 한계(대리주의, 개량주의 등)를 넘어 실업자 자신의 직접적 주체화를 통해, 점거와 시위 등 직접행동전술을 매개로 강력한 사회운동을 형성했다. 그리고 유로마치를 통한 이 운동의 국제적 확산은 비록 이후 사회운동 전반의 고양 속에서 독자성을 드러내지 못했음에도, 구조적 실업에 맞선 새로운 실업자운동의 한 전형을 제시했다.


주요 실업자운동 조직


<표> 김신양, <프랑스의 실업자운동>, [도시와 빈곤] 68호, 2004년 5-6월호


실업자 투쟁 일지(1997-98년)


97년 12월 11일 마르세이유 CGT 주도로 실업보험기금관리 사무소점거, 크리스마스 보너스 3000프랑 지급요구
12월 15-22일 3개 실업단체(AC!, Apes, MNCP)와 SUD, CFDT 좌파, CGT 노조 등 ‘긴급사회주간’ 선포
   17일 실업단체 루브르 박물관 피라미드 점거
   18일 마르틴 오브리 노동장관 특별연대수당(ASS) 3% 인상 발표, CGT 실업대책위와 면담
   20일 ’루브르 호소’를 위한 준비모임, 정부에 실업관련 공청회 요구
   24일 오브리 장관, 지자체에 실업대책반 구성 지시
98년 1월 2일 장-클로드 게소 건설교통장관(공산당) 일드프랑스 실업자에 대한 교통지원책 발표(전철 50% 할인)
1월 4-6일 도미니크 두아네 환경장관(녹색당)과 마리-조르쥬 뷔페 청년체육장관(공산당), 실업자시위 공개지지선언
    7일 26개 실업보험기금관리공단 점거, 니콜노타 이사장(CFDT 위원장) 노코멘트, 파리 공단본부 앞에서 3천명 시위, 마르세이유 등 전국 30개곳 시위
    8일 리오넬 조스팽 총리, 노사대표 및 실업자대표 면담
    9일 조스팽 총리, 긴급사회기금 10억 프랑 발표 조앵 랑베르 사회문제감독관에게 실업대책 보고서 작성 지시
    10일 정부, 경찰력 동원하여 공단점거 실업자 강제퇴거
    13일 실업자시위 재개, 파리 7천명, 마르세이유 8천명, 지자체 긴급구조기금 지급 시작, 조스팽 총리 최저사회수당 제도개선 및 수당 대폭인상 계획 발표
    17일 파리의 대규모 실업자시위 1만2천명 참가, 유럽 실업단체 대표 참가
2월 25일 조앵 랑베르 보고서발표, 실업단체들 호의적 반응
3월 4일 노동부장관,’고용, 건강, 주택 3개년 계획’ 발표
     7일 2차 전국실업자 시위, 1만여 명 참가
출처: 김신양, <프랑스의 실업자운동>, 두리, 1998년




아르헨티나 실업자운동(piqueteros)


1980년대 신자유주의 실험이 전 대륙를 무참하게 휩쓴 라틴 아메리카에서 사상 최대의 경제위기가 발생했다. 경제위기의 파고가 극점에 이른 2001년12월에 전 민중적 봉기가 발생하면서 신자유주의에 대한 파산선고를 내렸다. 그리고 이 광범한 민중봉기의 한 가운데 강력한 투쟁세력으로 이른바 피케테로스 운동이 등장했다.
1996-97년경 이미 실업노동자들의 도로봉쇄 및 주요시설 점거투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피케테로스운동은 2000년경 전국적 운동으로 확장되었다.


초기단계(1990년대 중반)


초기 피케테로스 운동은 수도권보다는 지방의 산업지대에서 민영화에 따른 정리해고 저지투쟁에서 대규모 실업투쟁으로 촉발되었다. 이들 투쟁은 정리해고 노동자들이 지역사회와 함께 지역봉기의 수준으로 발전하는 양상을 보였다.
- 산티아고봉기(Santiauenzano: 1993.12.10) 지방공무원 3개월 체불에 항의
- 1차 쿠트랄코봉기(Cutralcazo:96.6, Neuquen) 석유공사(YPF) 민영화, 구조조정 반대
- 2차 쿠트랄코봉기(Cutralcazo(97.4) 교원노조파업, Teresa Rodriguez 사망
이런 과정에서 양산된 실업자군은 재취업이 구조적으로 봉쇄된 신자유주의적 환경에 저항하기 위해 주체적인 조직화를 시작했고, 주요한 투쟁전술로 물류의 흐름을 봉쇄하는 ‘도로봉쇄’(Cortes de Ruta) 전술을 적극적으로 사용했다. 여기에서 피케테로스란 이름이 유래했다.
1990년대 후반 더욱 심화되는 경제위기 국면에서 조직노동자의 노동조합운동이 쇠퇴한 반면, 피케테로스의 대중투쟁은 더욱 확산되면서 피케테로스운동은 노동조합운동과 지역사회운동을 연결하는 고리이자, 새로운 노동자계급운동의 형태로 주목받게 되었다.


발전단계(1990년대 후반 ~ 아르헨티나 봉기)


1990년대말에 이르면 지역적 수준의 피케테로스 운동은 전국화한다. 이는 1997년 수도인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전국실업자운동(MTD)가 결성되고, 2001년 7월 전국 피케테로스 대회에 2,000여명의 피케테로스 활동가들이 참여하는 데에서 절정에 이른다. 이 단계에 이르면 피케테로스운동은 아르헨티나 전체 민중운동의 핵심세력으로 등장하게 된다.
전국적 조직의 확산과 더불어, 다양한 정파세력이 피케테로스운동에 개입함에 따라 수십 개의 피케테로스 조직이 활발하게 조직된다. 이런 피케테로스의 조직화는 아르헨티나 봉기 이후 전개된 주민총회(barrio assembly)운동, 공장점거/접수운동 등과 함께 연계되어, 총체적 경제위기 국면에서 자주적 반자본주의적 민중운동의 영역으로 정착하게 된다.
이와 더불어 피케테로스운동의 정치적 분화도 동시에 이루어지는데, 페론주의의 제도정치를 배제하는 자율주의적 피케테로스 운동은 지역연고 네트워크에서 페론주의로 포섭된 제도적 피케테로스 운동과 대립구도를 형성하게 된다.


현단계: 2004년 이후


약 10여년에 걸쳐 노동자파업을 대신하는 강력한 도로봉쇄 전술을 무기로 새로운 노동자계급운동의 가능성을 보였던 피케테로스운동은 자체 동력을 일정하게 상실하게 된다. 주된 이유는 2003년 등장한 네스트로 키르치너 정권의 민중주의적/신페론주의적 접근을 통해 아르헨티나 자본주의가 경제위기에서 빠져나온 상황이다.
더불어, 외부적으로 덜 알려져 있었지만, 피케테로스 조직자체의 운영에 실업기금이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점이다. 신자유주의 공세 앞에 페론주의 체제에서 구축된 전통적 사회복지시스템이 사실상 붕괴된 상황에서, 피케테로스의 강력한 저항은신자유주의 정권으로 하여금
일정한 실업지원 프로그램(노동프로그램[Programa Trabajar: 1996-2002]과 실업가장 프로그램[Programa Jefes/Jefas de Familia Desocupados:2002년 이후])을 가동하지 않을 수 없도록 강제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실업자조직이 실업프로그램 및 실업기금 지급에 관여하면서, 지방정부와의 연계가 대중투쟁보다 더 중요하게 되었다. 이런 지역적 맥락에서, 전국적 차원의 정치투쟁과 지역적 차원의 구제 프로그램 참여가 접목되는 독특한 상황적 아이러니에서 다수의 피케테로스 운동의 제도화가 꽤 광범하게 진행되었다. 일부의 경우 페론주의 집권여당의 지역연고 네트워크에 편입되면서,더욱 온건화되어 원래 피케테로스 운동의 존재이유를 스스로 부정하는 상황을 낳기도 했다.
1976년 군부쿠데타와 그 이후의 ‘더러운 전쟁’(1976-83년)의 활동가 학살(이른바 ‘실종’)의 여파로부터 아직 자유롭지 못한 아르헨티나 좌파의 분열과 종파주의 역시 피케테로스 운동의 자주적 발전을 가로막는 요소로 작동하고 있다.
최근 경제가 안정화되면서, 경제위기 이후의 성과를 되찾기 위한 노동조합의 파업투쟁이 서서히 확대되는 상황과 대조적으로, 피케테로스 운동은 과거의 활력을 유지하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업률이 낮아졌다고 해도, 막대한 비공식 부문을 고려하면, 피케테로스 운동은 아르헨티나 민중운동에서 여전히 중요한 부분이다.

<표>아르헨티나 조직적 도로봉쇄 통계, 1997-2002년


총괄적 평가 - 새로운 단계의 실업자운동


프랑스 실업자운동과 아르헨티나의 피케테로스 운동이 최근의 실업자운동을 모두 포괄하는 것은 아니지만, 신자유주의 시대의 변화된 정세와 조건 속에서 시도된 새로운 형태의 실업자운동으로 그 의미는 중대하다. 더불어, 최근 몇 년간 사회적으로 부각되지 못하고 있지만, 이 운동은 미래의 운동이기도 하다.
이 새로운 세대의 실업자운동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첫째, 점거와 도로봉쇄를 포함한 투쟁전술과 전투성이다. 1980년대와 1990년대 제도화된 노동조합의 대응이 가졌던 정책대안상의 한계를 넘어, 정권과 자본을 압박하고 제도 밖으로부터 반자본주의적-탈자본주의적 대안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과거의 실업자운동이 노동조합운동의 부문운동으로서 가졌던 한계를 넘어선다고 하겠다.
다음으로, 냉전시대의 정치적 구도가 해체된 상황에서, 특히 제도 좌파와 기존 노동조합들이 더 이상 노동자-민중의 이해를 대변하지 못하는 정치적 상황에서, 실업자 대중을 주체로 정립하여 독자적인 조직운동의 영역을 열었다는 점이다. 물론, 정당이나 노동조합과의 관계에서 과거와 같은 후견주의적 관계가 되풀이되는 경우도 적지 않지만, 노동조합 및 좌파정당의 한계를 뛰어넘는 아래로부터의 실업자 조직화에 기초한 독자적 세력화의 목표에 상당히 근접한 새로운 모델을 제공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업자운동은 현재의 운동임과 동시에 미래를 향해 열려진 운동이다. 프랑스 실업자들의 점거투쟁과 아르헨티나 피케테로스 운동은 반자본주의적 지향을 강력히 내포한 반신자유주의 대중운동의 한 영역으로 자리매김 해야 될 것이다.


4. 주요한 쟁점과 과제


현 정세는 실로 심각하다. 2930년대 대공황에 비견되는 2008-09년의 경제위기의 공포가 전 지구를 짓누르고 있다. 이는 신자유주의 축적체제 하에서 불가피한 구조적 실업이 신자유주의의 누적적 효과로 더욱 빈번하게 발생하는 주기적 대량실업과 결합하는 양상으로 드러나고 있다. 그렇기에 현시기에 새로운 실업자운동의 가능성과 과제가 전세계 노동운동과 좌파운동의 긴급한 과제로 제시되고 있다.
과거와 질적으로 상이한 상황 속에서 전개될 새로운 실업자운동은 어떤 방향을 향해 나갈 것인가? 과거의 운동처럼 제도화의 길을 걸을 것인가? 아니면 신자유주의를 넘어, 아니 자본주의를 넘어선 전투적 운동의 단초를 제공할 것인가?
기본적으로 실업의 성격과 양상이 실업자운동의 규모와 형태를 결정하겠지만, 주체적 요소 역시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특히, 신자유주의 공세에 의해 많이 파괴되었지만 일정한 형태의 실업보험과 사회복지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단순한 제도적 요구를 넘어 실업노동자들을 보다 넓은 노동자계급운동의 한 주체로 정립할 것인가는 노동운동과 좌파운동의 주체적 준비정도와 조직화-주체화 전략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제기되는 문제들


당면한 실업자 조직화의 과제는 무엇보다도 실업의 양상과 원인에 대한 분석에 기초하여, 구체적인 투쟁의 요구로 정식화해야 한다. 특히, 국가와 자본의 실업대책이 갖는 한계를 넘는 대중적 요구의 정식화는 초동주체의 형성단계에서 중요하다.
이와 더불어, 실업문제를 사회적 의제로 부각시킬 다양한 전술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 과거의 경험에서 배우되, 새로운 창조적 전술의 개발과 접목시켜 투쟁의 성과를 최대화하기 위한 기획이 필요하다. 특히 프랑스 실업자들의 실업기금관리공단 점거투쟁과 아르헨티나 피케테로스의 도로봉쇄 전술은 실업자운동이 독자적 사회운동/노동운동으로서 성공하는 열쇠였다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조직적 측면에서, 주체형성의 초기시점에서 노동조합 및 좌파정당, 사회단체들의 지원은 필요하지만, 실업자의 독자적 주체화의 원칙을 견지해야 할 것이다. 과거의 경험에서 비추어 거대한 대중운동으로 성장한 실업자조직도 경기순환에 의해 쉽사리 사라지곤 했음을 볼 때, 지속가능한 독자적 실업자운동을 가능하게 하는 요소들에게 실천적 고민을 집중해야 할 것이다.


실업자운동의 주체형성과 대중운동으로의 발전을 위하여


기본적으로 실업의 형태는 다양하다. 우선 기존에 누적된 장기실업자군, 경제위기로 생산(?)되는 정리해고 실업자들, 노동시장에 진입하지 못한 청년실업군 등. 실업자 외에서도 광범한 비정규직은 형식상 취업하고 있지만, 공황의 압박 하에서 사실상 직업을 가진 실업자로 근접하고 있으며, 이런 의미에서 비정규직운동과 실업자운동의 연대고리가 형성될 수 있다.
그러나 현재로선 미조직 실업자들의 자연발생적 행동이 실업자운동으로 발전하기를 기대하기는 쉽지 않다. 비록 잠재력이 크다해도 이들의 투쟁을 촉발한 촉매제가 필요하다. 따라서 현실적으로 실업자투쟁을 선도할 주체는 정리해고로 발생한 실업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초동주체를 형성해야 하며, 여기에서 노동조합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역사적으로나 현실적으로 실업자(운동)에 대한 노동조합의 태도는 대부분 부정적 또는 소극적이었고, 1930년대 CIO나 자동차노조(UAW)의경우를 예외로 하면, 실업자들이 주체적으로 조직화되는 시점에야 마지못해 지지/지원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뿐만 아니라 개량주의 좌파정당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주로 공산당 또는 전투적 좌파정당들이 아래로부터 실업자를 조직하고, 안팎에서 당지도부에 대한 압박이 가해질 때 움직이곤 했다.
실업자운동의 초동주체 형성과 대중운동으로의 발전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노동조합과 좌파정당의 활동가들의 역할이 중요하며, 특히 조직화의 초기국면에서는 국가와 자본의 이데올로기 공세에 맞선 선전선동이 핵심적 관건이 된다. 이 이데올로기 전선을 통해 실업대중이 수동적 피해자에서 능동적 주체로 전환할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이 형성될 수 있는데, 비록 소수라도 선도적 투쟁을 매개로 대중적 투쟁을 촉발할 수 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구조적 실업과 주기적 대량실업이 결합되는 현시기에 실업자운동은 새로운 미래의 운동으로 발전한 강력한 잠재력을 갖추고 있으며, 공황시기 노동운동의 한 영역으로서 노동자계급운동을 확장하고 강화할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를 넘어선 지평을 확장할 수 있는 미래의 운동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20세기의 격동적 계급투쟁 속에서 실업자운동을 대중적 운동으로 성장-발전시키는 활동가들과 조직가들의 모범에서 창조적 미래를 꿈꾸는 것은 사회주의 사회를 아래로부터 건설하는 투쟁의 한 부분이기도 하다.

<참고문헌>
김신양, <프랑스의 실업자운동>, 두리, 1998년.
김신양, <프랑스의 실업자운동>, [도시와 빈곤] 68호, 2004년 5-6월호
Ana Dinerstein, “The Politics of Unemployment: Employment policy, the Unem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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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king Paper. Febryary 2008
Ignaciono Franceschelli & Lucas Ronconi, “Clientaellism, Workfare and Emerg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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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mes Lorence, Organizing the Unemployed,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1996.
Andrew Richards, “Mobilizing the Powerless: Collective Protest Action of the
Unemployed during the Interwar Period”, Working Paper 2002
Edward Levonson, Labor On the March, Cornell University Press, 1995.



원영수 | 진보평론 편집위원, 사회주의노동자정당건설 준비모임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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