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개발연구원(KDI)의 보고서에 의하면 1992년 7.7%수준으로 10%를 밑돌던 우리나라 빈곤층 비중은 2007년 14.4%로 두 배 가량 급증했다. 우리나라의 경제위기가 빈곤층을 늘리고 있다는 것이며, 빈곤의 원인이 결국 사회적인 것임을 반증한다. 또한 전 세계적으로 하루 1달러 미만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11억 명에 이른다. 전 세계에서 7초마다 한 명의 어린이가 기아로 목숨을 잃고 있으며, 세계인구 절반은 하루 2달러 미만(한 달 6만 원)의 생계비로 살아가고 있다. 이 사람들의 빈곤함 또한 개인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빈곤은 개인에게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것이며, 자신이 누려야 할 권리를 빼앗기고 있는 상태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그럴 때 빈곤에 대해서 올바른 인식을 갖고 올바른 대응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빈곤이란 어떤 것일까? 가장 일반화된 빈곤 개념은 ‘소득이 저조한 상태’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소득이 전체 평균소득의 1/2 미만일 경우 상대적인 빈곤이라고 하고, 1/3 이하인 경우 절대적인 빈곤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우리나라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경우 올해 통계청의 경제인구부가조사에 따르면 월평균 임금이 정규직 임금의 60.5% 수준이다. 월평균임금 외에 복지비용까지를 포함한다면 정규직 임금의 50%가 되지 않는 노동자들이 많이 있다. 게다가 최저임금선에 임금이 머물러있는 용역 노동자 대다수를 생각해보면, 이들은 열심히 일하는데도 빈곤선에 놓여있다. 다시 말해서 단지 고용형태가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만으로도 ‘빈곤’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고용형태를 이유로, 그리고 특정한 노동에 대해서 가치를 깎는 사회적인 구조에 의해서 ‘소득이 저조’해지고 이것이 빈곤으로 연결된다.
그런데 단지 소득이 저조한 것만이 빈곤의 전부는 아니다. 살아가면서 비용을 지불해야 할 일이 많다면 소득 여부와는 무관하게 빈곤해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의 건강보험은 ‘약값 할인제도’라고 불릴 정도로 큰 병에 대해서 제대로 보험이 적용되지 않는다. 백혈병 치료약인 글리벡에 의료보험을 적용하라고 요구하면서 국가인권위원회에서 농성을 한 적이 있다. 백혈병 치료약인 글리벡에 의료보험이 적용되지 않는다면 한 달에 300만원 가까운 약값을 지불해야 한다. 약값을 낼 수 없는 이들은 죽어갈 것이고, 이 약값을 가까스로 마련하는 이들도 너무 많은 지출로 빈곤상태에 떨어지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의료보험제도가 엉망이면 소득이 높더라도 빈곤해질 가능성은 높다.
이것은 집값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신이 몸을 누일 집 한 칸을 얻기 위해서 평생 저축을 해야 한다. 10년 동안 일을 해서 6천만 원짜리 전세 하나를 얻으려면 한 달에 최소한 50만원을 저축해야 한다. 내 소득이 평균소득이 되더라도 집 한 칸을 갖고 있지 못하다면 나는 결국 적은 소득을 가진 것과 다름이 없다. 부동산이 투기의 대상이 되고 집값이 천정부지로 솟고 있기에 집을 위해서 돈을 저축할 수밖에 없고, 이런 사회에서는 소득이 평균 정도 된다고 해도 빈곤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빈곤은 ‘소득의 유무’로만 판단할 수는 없다. 우리 사회가 끝없는 위험을 안고 있고, 그 위험을 저축이나 부채로 해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며, 또한 집이나 교육을 위해서 더 많은 소득을 지출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소득과는 무관하게 삶의 가치를 누리지 못하는 ‘빈곤한 상태’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그렇게 빈곤한 삶을 살고 있다.
빈곤은 우리가 사회적으로 성취할 수 있는 다양한 삶의 가치들을 실현하지 못하게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삶의 가치가 ‘돈’으로만 실현된다. 배우고 싶어도 돈이 있어야 하고, 예술을 즐기고 싶어도 돈이 있어야 한다. 책을 읽고 여행을 하고 싶어도 돈이 없으면 안 된다. 소득이 적다는 것, 미래에 대한 불안 속에 놓여있다는 것은 우리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고, 내가 이루고자 하는 가치들을 덮어두고 단지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인간으로 만든다.
2. 신자유주의에서 빈곤의 원인과 심화 경향
빈곤 문제는 구조적이고 오래된 것이다.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에 들어서면서 급격한 생산력의 발달이 이루어졌고, 절대적인 재화의 총량은 늘어나고 있다. 재화가 부족하여 빈곤이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과거도 마찬가지이다.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충분한 생산량이 확보되지 않아서 보릿고개가 생기기도 했지만 양반들이나 정치권력의 ‘수탈’에 의해 민중들의 빈곤이 더 심화되기도 했다. 그렇지만 과거에는 전체적인 재화량의 부족이 빈곤현상에 일조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가 이루어놓은 엄청난 생산력을 생각해볼 때 지금의 빈곤은 정말로 기형적이다.
유엔대학 세계개발경제연구소(UNU-WIDER)에서 2000년을 기준으로 하여 ‘가계자산 국제 분포 보고서’를 발표하였는데 그 내용에 따르면, 전세계 가계자산은 총 125조 달러로 전세계 국내총생산의 3배로 성인 1인당 2만500달러의 부를 갖고 있다. 그런데 전 세계 부자 중 상위 1%가 갖고 있는 부는 50조 달러로 전체의 40%에 달한다. 전 세계의 부의 85%는 상위부자 10%가 갖고 있다. 반면 하위 50%(자산 2200달러미만)가 보유하고 있는 부는 전체의 1%에 불과했다.
즉 현대사회의 빈곤은 ‘풍요 속의 빈곤’이다. 사회적 재화의 양이 너무나 많은데도 빈곤현상이 심화되는 것은 소수의 손에 부가 절대적으로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을 ‘양극화’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정확한 표현은 아니다. 양극화라고 하려면 그만큼 부가 집중되는 상층의 규모도 커져야 하는데, 지금은 절대 다수가 빈곤해지고 있고, 일부의 손에만 부가 집중되는 양상이므로 대다수의 ‘빈곤화’라고 불러야 정확할 것이다.
또한 현대사회의 빈곤은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점차로 심화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특히 신자유주의 정책과 연관이 있다. 현재 세계적인 빈곤의 확산은 IMF 등의 구조조정 요구에 의해 농업을 근간으로 하는 지역경제가 파탄난 것이 하나의 원인이다. IMF 등은 자본시장을 개방하도록 해서 그 나라의 자본형성 기회를 차단하고 초국적 금융자본에 종속되도록 만든다. 비민주적인 독재정권과 군사정권을 지원해서 정치적이거나 경제적인 억압구조로 민중을 더 잘 수탈할 수 있도록 만든다. 그것이 지금 세계 여러 나라에서 빈곤이 심화되고 있는 핵심 원인이다.
한국 등 여러 나라의 경우는 경제위기 이후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으로 인해서 실업과 불안정노동이 증가하고 이로 인해서 빈곤해지는 ‘신빈곤층(노동빈곤층)’ 문제가 심각하다. 그리고 공공부문 사유화나 복지제도의 축소로 인한 빈곤 가능성도 높다. 정부는 기업 활동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해주기 위해서 국가의 개입을 줄여야 한다고 이야기하면서 미미한 소득을 보완해왔던 각종 복지시스템을 파괴하고 빈곤을 심화시킨다. 빈곤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더욱 축소시키고 빈곤한 개인의 탓으로 돌리고 있다.
지역마다 빈곤의 원인은 다를 수 있겠으나 신자유주의 정책이 각각의 나라에서 빈곤을 심화시키는 원인으로 작동하고 있다. 경쟁과 효율을 앞세운 자본의 논리와 국제적인 경제 통합 과정에서 소수의 사람만이 부를 축적하고, 그것은 소수를 제외한 다수의 궁핍을 전제로 하게 된다. 이런 신자유주의 정책이 미친 바람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이상 세계적인 빈곤은 필연적이다.
3. 한국에서 빈곤을 양산하는 각종 구조들
한국의 빈곤율은 1976년에 20.4%였다. 농촌경제를 붕괴시키고 도시빈민으로 만들어서 낮은 임금으로 수탈을 가능하게 하고자 한 박정희 정권의 정책 때문에 빈곤한 사람들의 숫자는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65년부터 95년 사이에 일인당 실제 소득은 평균 7.5%의 높은 성장률을 보여 도시가구의 빈곤율을 1995년 7.4%로 감소시켰다. 그러나 그 때에도 여전히 빈곤층은 유지되었다. 정부에서는 노동능력이 없다고 간주한 민중들에 대해서 배제적인 태도를 갖고 있다. 장애인과 노인 등의 권리를 임의로 박탈하고 노동할 권리나 생존할 권리를 부여하지 않는다. 생존을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고, ‘사회복지’라는 이름으로 사회 전체에서 배제했다. 그렇게 일부 민중들을 빈곤하게 만들어왔던 것이다.
그런데 2007년 빈곤층이 14.4%로 급증한 것은 경제위기 이후의 구조조정이 원인이다. 특히 김대중 정권은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내수를 촉진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경기부양정책을 썼고, 생존을 위해서 대량으로 남발된 신용카드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노동자들은 이후 고용의 불안정성이 높아지면서 금융파산을 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급격하게 빈곤층 비율이 높아졌다.
또한 기업들의 구조조정이 확산되면서 불안정노동이 늘어났다. 비정규직이 전체 임금노동자의 60% 가까이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렇게 불안정노동을 늘리는 것은 자본의 이윤창출을 위한 주요 전략이기도 하다. 자본이 원하는 시기에 원하는 만큼만 노동자들을 고용하려면 광범위한 노동자군이 예비상태로 놓여있어야 한다. 불안정한 노동이 많아지면 예비상태로 흘러들어갈 수 있는 노동자들이 많아지게 된다. 또한 노동이 불안정하게 되면 자본이 손쉽게 일자리를 매개로 하여 권력을 행사할 수 있다. 노동자들은 고용되기 위해서 경쟁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 경쟁의 과정에서 자본은 바닥에 있는 노동자들에게 간신히 생존할 수 있을 만큼의 저임금만 주면서 노동자들을 위계화한다. 그러면 노동자들은 살기 위해서라도 높은 위계에 올라가기 위해서 경쟁하고 노력할 수밖에 없다. 이 과정에서 자본의 통제력은 강화된다. 그래서 자본은 비정규직의 고용형태도 세분화하고 임금도 계속 낮추는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일하지만 빈곤할 수밖에 없는 노동자들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보건사회연구원의 2007년 보고서에 의하면 한국 빈곤층 전체에서 임금노동자는 32.4%, 비임금 노동자는 10.6%, 실업자가 9.8%를 차지한다. 다시 말해서 빈곤층의 52.8%가 일을 하고 있거나 일을 하고 싶어하는 노동자들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통계청 조사자료에서 빈곤층 경제활동인구에서 임금노동자는 59.7%에 이른다. 시간제 노동자 월평균임금 55.8만원, 용역 및 일일노동자 월평균임금 119.1만원 등 생계에 훨씬 못 미치는 열악한 임금이 일하는 노동자들을 빈곤으로 내몰고 있다.
정부에서는 생산적 복지, 참여복지라는 이름으로 노동과 복지를 연계한 전략을 만들어내어 불안정한 일자리를 더욱 확산하고 있다. “노동 없이 복지 없다”는 말로 요약되는 이 정책은 복지를 파괴하여 낮은 임금과 고통스러운 일자리라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도록 강제하는 구조이다. 자본주의 초창기에 영국 정부는 ‘빈민구제법’을 통해서 지옥같은 공장에서의 노예노동을 거부하는 자들에게 낙인을 찍고 강제노역을 시키곤 했다. 그러면서 자본주의적 공장노동에 복종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그것처럼 ‘생산과 복지의 연계전략’은 정부와 자본이 만들어내는 불안정한 일자리에서 강제로라도 일해야 생존이 보장되는 구조를 만듦으로써 불안정한 일자리에 대한 저항을 봉쇄한다.
그런데 이후에 공기업이 사유화되면서 의료보험료나 교육비가 다시 상승하고, 대중교통요금의 상승, 부동산 가격의 상승 등이 현실화되면 민중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질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단지 평균임금의 1/2이냐 1/3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대다수의 노동자들이 소득보다 훨씬 더 많은 지출에 허덕이면서 빈곤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후 일하면서도 가난할 수밖에 없는, 생존을 위해서 노예노동을 감수해야 하는 그런 삶이 우리 앞에 놓이게 될 수도 있다. 아니, 이미 시작되었다.
4. 빈곤문제를 왜곡하는 이데올로기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신이 빈곤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했다. ‘빈곤’이 개인의 무능력 때문인 것처럼 인식되어왔기 때문이다. 또한 빈곤은 남에게 기대는 상태를 의미한다는 왜곡된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의 조사에서는 달라진 모습을 보인다. 취업사이트 ‘사람인’이 20~30대 직장인 919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의하면 65.2%가 스스로를 일하는 빈곤층이라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연봉이 적어서 그렇게 생각한다는 답이 가장 많고, 고용불안, 노력해도 나아지는 것이 없어서, 부유층과의 차이 등도 답변의 많은 부분을 차지했다. 이미 우리나라 젊은 노동자들은 개인의 노력으로 빈곤에서 벗어나기 힘들며 이 빈곤이 구조적인 문제임을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정부와 자본은 ‘빈곤’이 신자유주의 정책의 결과라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서 왜곡된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낸다. 그들은 복지에 대한 요구가 ‘일하지 놀고 먹으려는 게으른 심성’ 때문인 것처럼 주장한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에 놀아나서 “3D 업종에 가서 일하면 되지 눈이 높아서 취업도 못하고 가난해지는 것이다”라는 말을 되뇌이는 자들도 있다. 이들은 빈곤이 개인의 게으름의 소산이라고 믿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최근의 노동시장 상황을 봐서도 알 수 있듯이 경제침체에 따라서 임시직 및 일용직 신규채용은 17.2만명이 감소한 반면, 정규직 신규채용은 5.7만명이 감소했다. 다시 말해서 임시 일용직이 제일 먼저 해고되고 가장 고용이 불안정한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이 주장이 얼마나 터무니 없는 것인지 알 수 있다.
또한 정부나 자본은 ‘경쟁 이데올로기’를 끄집어내서 빈곤이 패배자에 대한 응보라고 주장한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투쟁을 할 때 “열심히 노력을 하거나 공부를 해서 정규직이 되라”고 주장하는 답글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이것은 경쟁에서의 승리자가 일부 있다는 것과 관계 없이 전체적으로 일자리가 줄어들거나 불안정해지고 있다는 현상을 애써 가리려는 이데올로그들의 논리에 놀아난 결과이다.
그러나 이런 이데올로기들이 현실에서 힘을 발휘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논리들이 회자되는 것은, 자신이 불안정한 노동자가 되어서 빈곤의 늪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현실을 애써 회피하거나 두려움을 무마해보려는 몸부림에 불과할 수도 있다. 이미 많은 이들은 빈곤문제가 구조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것을 구체 현실로 확인하고 싶지 않고 다만 그것이 그들 개인의 게으름의 문제라고 생각해버리고 싶은 욕구의 반영일 뿐인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분노나 두려움을 정부나 자본이 ‘정규직의 경직성’ 혹은 ‘정규직들의 높은 임금’에 대한 공격으로 나타나도록 유도하고 있다는 데에 있다. 개인들에게는 빈곤에 대한 두려움과 고통이 있지만 이것을 구조적인 문제라고 생각하게 되면 너무 큰 문제가 되어버리고 당장에 싸워서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없어진다. 그러다보니 눈앞에 보이는 현상, 즉 정규직이 많이 받는다는 사실에만 주목하게 된다. 정부는 ‘정규직 이기주의’를 내세워서 이런 이데올로기를 퍼뜨리고 이러한 현상을 ‘양극화’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한국개발연구원 보고서에서도 확인되듯이 정규직 노동자들도 점차로 빈곤해진다. 자료에 따르면 소득에 따라 10개의 계층으로 나눌 수 있는데, 정부에서는 3분위에서 8분위까지를 모두 중산층이라고 부른다. 이중에 소득이 평균이상을 약간 유지하는 5~6분위의 사람들은 대부분이 정규직들일텐데, 이들과 전문직종 등이 주로 포진된 7~8분위의 소득격차는 날이 갈수록 벌어지고 있다. 즉 보수언론들에서 떠드는 ‘중산층 하락’의 실체는 그나마 나은 임금을 유지하고 있던 정규직 노동자들의 하락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경제위기 이후 전체 GDP에서 임금이 차지하는 노동소득 분배율은 계속 하락하고 있다. 한국노동연구원에 따르면 2004년 노동소득 분배율은 58.8%로 1999년 이후 6년 연속 60%를 밑돌았다. 노동소득 분배율은 외환위기 직전인 1997년(62.3%) 최고치를 기록한 뒤 1999년부터 6년 연속 60%를 밑돌고 있다. 기업들은 계속 돈을 벌고 있는데 노동자들에게 돌아오는 소득은 계속 하락하는 것이다. 전체 소득에 대한 임금노동자의 소득 축소에 대해서 맞서 싸워야 하는데 오히려 이렇게 낮아지는 소득을 놓고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서로 싸움을 하도록 만드는 것이 자본과 정권의 이데올로기 전략이다.
그런데 이런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할 힘이 없다고 생각될 때 많은 이들은 ‘경제발전’이 탈출구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명박 정권의 탄생배경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경제발전을 통해서 ‘빈곤문제’를 해결한다는 논리는 빈곤의 원인을 잘못 짚어도 한참 잘못짚은 것이다. 정부가 이야기하는 ‘경제발전’은 신자유주의 정책을 더욱 급격하게 추진하는 것이다. 시장개방, 공기업의 사유화, 정규직의 고용경직성 완화, 그리고 각종 개발정책 등은 노동자들을 더욱 빈곤하게 만드는 정책들일 뿐이다. 이로 인해서 GDP의 수치는 회복될지 몰라도(실은 이것도 의심스럽지만) 그것은 고용의 불안정성을 전제로 한 수치일 뿐이고, 결국 노동자 민중은 계속 빈곤해질 수밖에 없도록 부추기는 정책인 것이다.
5. 빈곤으로부터 벗어나는 투쟁의 출발
우리는 몇 가지 제도적 장치들을 마련함으로써, 완전하지는 않지만 빈곤문제에 맞서는 아주 작은 성과를 만들어내고자 노력해왔다. 그리고 그런 실천은 여전히 중요하다.
예를 들어 최저임금현실화 투쟁을 제대로 해서 빈곤을 양산하는 저임금 구조를 조금씩은 개선할 수 있다. 그러려면 노사정 합의의 방식으로 이루어지지만 결과적으로 공익위원들의 자선에 기댈 수밖에 없는 현재의 최저임금 결정 구조와 방식을 바꾸어야 한다. 그리고 집단적인 투쟁을 통해서 최저임금을 현실화함으로써 노동을 하면서도 절대적인 빈곤에 처해있는 노동자들의 삶을 개선할 수 있다.
또한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상의 독소조항을 없애서 설령 내가 노동하지 못하더라도 생계는 보장받을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상의 기준이 되는 최저생계비를 현실화해서 정말로 제대로 생계를 보장할 수 있는 제도가 되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4대보험도 완전 적용되도록 해야 한다. 내가 실업을 당했을 때 고용보험이 제대로 적용되어야 한다. 그래서 생존의 고통 없이 새로운 일을 찾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의료보험제도를 제대로 개혁해서 질병으로 인해 생계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 없어야 한다. 노동재해를 당했을 때에도 충분히 보상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재활이 가능해야 한다. 내가 나이가 들어 일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에도 생계가 보장되어야 한다.
우리는 이러한 요구들을 내걸고 각자의 공간에서 힘겹게 싸움을 하고 있다. 최저임금제도는 저임금 노동자들이 앞장서고,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상의 독소조항 폐지에는 장애인 동지들이 앞장서서 싸우고, 4대보험 적용을 위해서는 관련 공공부문 노동자들이나 노동보건 단체들이 앞장서서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의 현실은 오히려 이런 제도를 개선하기보다는 개악하려는 시도를 막아내는 데에도 힘겹다. 정부에서는 우리의 요구를 짓밟고 철저하게 개악으로 응수한다. 경총에서도 최저임금제도에서 예외조항을 늘리거나 생산성을 반영하는 등의 개악을 추진하고 있고, 공기업을 사유화, 그 중 병원사유화와 민간의료보험 도입을 하려고 하고, 산재보험도 개악하여 산재불승인을 남발하거나 설령 승인을 받았더라도 제대로 치료하고 복귀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각종 조치들을 취해놓고 있다. 이런 정부의 태도에 맞서서 개별적으로 싸움을 하기는 하지만 무척 힘겹고, 하나하나 패배해가고 있다.
그렇다면 빈곤에 맞서는 투쟁은 새롭게 구성되어야 한다.
우리가 진정 빈곤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면 빈곤을 양산하는 신자유주의에 맞서는 저항전선을 만들어내야 한다. 다시 말해서 몇 가지 제도적인 장치들을 마련하거나 그것을 위해서 투쟁한다 하더라도 지속적인 빈곤의 심화 경향을 막아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투쟁들이 의미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그 투쟁의 목표가 신자유주의에 맞서는 저항전선을 설치하고, 사람들의 문제의식을 발전시키고 사람들을 모으는 것이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민중들의 불만과 고통은 점차로 고조된다. 빈곤은 삶을 파탄내고 사람들의 분노를 모아낸다. 하지만 우리가 그것을 하나로 모을 힘이 없다면 결국 그 불만과 분노는 오히려 조직된 노동자들에게 집중될 수 있다. 그러므로 ‘빈곤’이라는 화두를 노동자와 민중들에게 던지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우리의 입장을 이야기해야 한다. “모든 노동자는 정당한 임금을 받을 권리가 있으며, 노동하지 않더라도 생존을 보장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을 선언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구체적인 하나의 전선으로 모아질 수 있도록 투쟁을 만들어야 한다. 개별의 사안에 집중하는 방식이거나 개별 사안들을 나열하는 방식으로가 아니라, ‘빈곤’ 그 자체를 하나의 이슈로 해서 집단적으로 노동자와 민중들을 모아나가는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투쟁계획이 올해의 10월 7일 ‘세계 빈곤의 날’ 행사는 바로 그런 문제의식을 공공연하게 던지는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그렇게 모이고 집중하는 힘은 구체적인 요구로 제출되어야 힘이 생긴다. 그런 점에서 ‘생계비 개념의 복원’과 “최저임금과 최저생계비의 기준이 그렇게 복원된 생계비 개념에 기준하여 만들어지도록 제도개선을 해나가는 것”을 당장의 요구로 집약해볼 수 있다고 본다. 민주노총은 최저생계비에 대해 전체 노동자 평균임금의 1/2을 최저임금 요구로 내걸고 있다. 어떤 노동자도 그가 일하는 이상 ‘빈곤선’ 이하로 임금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그렇지만 전체 노동자 평균임금이 점차로 낮아지고 있는 상황에서 이것만으로는 빈곤의 심화에 맞서기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최저임금 투쟁에 ‘생계비’ 개념이 도입되어야 하고, 생활 가능한 임금을 받아야 한다는 요구가 관철되도록 해야 한다.
지금은 생계비는 생존을 위한 최저의 개념으로 설정되어 있다. 중앙생활보장위원회에서 최저생계비를 결정하는데 사실상 정부 각 기관의 예산에 끼워맞추는 방식으로 결정된다. 생계비 개념을 복원한다는 것은 매우 이데올로기적인 것이다. ‘생계비’는 인간다운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도대체 우리에게 무엇이 얼마나 필요한가를 사회적으로 결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둘러싼 투쟁의 과정이다. 그러기에 ‘생계비’ 결정에 대한 투쟁은 무수히 많은 노동자와 민중에게 우리에게 필요한 소득을 요구하는 것이 ‘당연한 권리’임을 인식시키는 과정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최저임금 현실화 투쟁과 최저생계비를 현실화 투쟁으로 나타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이 과정도 제도개선을 ‘쟁취’하기 위한 것으로서가 아니라 그 자체가, ‘일을 하든 안 하든 인간의 존엄을 위하여 이만큼의 소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밝히는 이데올로기 투쟁이 되도록 하고, 빈곤심화의 원인이 아직 경제가 덜 발달해서가 아니라, 경제 발달 자체에 있으므로 이제는 우리의 ‘권리’를 이야기해야 할 시점이라는 것을 밝히는 투쟁의 과정이 되도록 해야 한다. 구체적인 요구에 입각하여 노동자와 민중들을 함께 모으고 이 힘이 신자유주의 반대투쟁 전선에 의미있는 한 부분이 될 수 있도록 해보자.
어렵더라도 시작할 때 그것은 길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