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결 따스해진 햇살이 봄날이 멀지 않았음을 알려주는 요즈음입니다. 신상품이라는 딱지를 달고 거리에 진열된 화사한 봄옷들은 계절의 경쾌함을 재촉하는 듯 합니다. 그러나 정작 그 옷들을 만드는 노동자들의 삶은 경쾌할 수 없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한창 봄옷들이 출시되어 거리 전체가 화사하기 그지없는 서울 송파구 문정동 로데오 거리 한편에 올해 2월부터 천막이 등장하여 눈길을 끌고 있습니다. '안혜경 부띠끄' 본사 앞에서 계약해지 철회! 소사장제 폐지! 등을 요구하며 투쟁을 진행하고 있는 서울의류노조 로라(주) 분회 동지들을 만나보았습니다.
희소가치가 있고 고가의 의류를 제조·판매하는 디자이너 '안혜영 부띠끄'는 국내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유명 디자이너 부띠끄입니다. 가진 자들의 옷을 만드는 (주)로라 안혜영 부띠끄는 IMF이후 오히려 매출이 늘었음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에게는 경기가 어렵다는 핑계를 대면서 임금을 삭감해왔습니다. 생산직 노동자들의 경우 4년 동안 임금인상이 없었고 오히려 옷의 난이도 별로 추가지급 되어왔던 부분을 없앰으로써 실질적으로 임금이 삭감되게끔 했
던 것입니다.
게다가 회사는 노동자들에게 개인사업자등록과 소사장제 계약을 체결할 것을 종용했습니다. 부당한 처사라는 것을 알지만, 해고의 위협 속에 아무 말도 못하고 원치도 않은 소사장이 되어버린 로라 노동자들은 노동자로서의 정당한 권리를 요구할 수 있는 길조차 막혀버린 것입니다. 사용자의 구체적인 지휘감독을 받으면서, 심지어 출근카드까지 찍으면서 일을 해온 미싱사들은 실질적으로 (주)로라에 고용된 노동자임에도 불구하고, 근로기준법을 피해가기 위한 회사의 조치로 인해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누릴 수도 없는 처지에 놓여있습니다.
열악한 노동조건 속에서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누리기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고급기술자라는 자부심하나로 숨죽이고 일해온 로라 노동자들. 그러나 생산직 노동자 절반 가량이 관리자의 말 한마디로 해고되어 하루아침에 거리로 내몰리는 상황을 더 이상 참아내지는 않았습니다. 부당한 계약해지로 인해 분노가 폭발한 로라의 노동자들은 지난 해 8월 노조를 결성, 12월부터 중식집회를 시작했고 올 2월부터는 천막농성을 진행 중입니다. 이제 시작에 불과하지만, 반드시 승리하여 원직복직 쟁취뿐만 아니라 전 의류산업노동자들의 희망을 안아오겠다는 포부로 로라분회 동지들은 겨울의 추위를 뚫고 투쟁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2차 결의대회에서 삭발식을 진행한 후 머리가 파르스름해진 박광춘 분회장 동지와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Q 노조 결성과정에 대해 이야기해주세요.
A 작년 7월말 정도에 관리자가 생산부로 와서 일을 하고 있던 사람들에게 "***는 그만두고, ***는 남아라"라는 식으로 해고통보를 했습니다. 절반 가량의 인원이 해고되는 것이었지요. 이러한 처사에 분노한 사람들끼리 뜻을 모아서 서울의류노조의 지원 하에 지난 해 8월 분회를 결성하게 되었습니다.
Q 어떠한 요구를 진행해 왔는지요?
A 노동조합결성 이후 단체협약을 체결하고 특수고용직 노동자 고용보장 합의서를 작성했습니다. 그후로 회사는 조합원/비조합원 간에 일감에 차이가 나게끔 작업을 배분하는 등 치사한 방식으로 탄압을 가했습니다. 이는 곧 임금차별로 이어지는 것이라서 노동자들간에 갈등이 유발되는 것이지요. 그러다가 11월경 임금 10% 삭감방침이 떨어졌습니다. 노조가 엄연히 존재하는 데도 일체의 협상과정이 없었지요. 사내방송을 통해 임금을 내리겠다며 일방적으로 통보했습니다. 이에 노조는 임금삭감에 반대하는 설문조사를 진행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노동조합에 가입해서 임금삭감방침을 철회시키고 싶다는 의사를 밝혀왔지요. 결국 노조의 행동으로 회사의 임금 10% 삭감방침을 철회시켰습니다.
Q 현재 두달 가까이 중식집회, 보름 넘게 천막농성을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간략히 투쟁경과를 설명해 주십시오.
A 임금삭감을 막아낸 이후 회사 측에서는 보다 치사한 방식으로 노동자들을 탄압해왔습니다. 12월 들어서, 창고가 필요하다는 명목으로 재단실을 옮기면서 재단판을 축소하려고 했습니다. 이렇게 되면 미싱판 일이 줄어드는 건데, 결국 미싱사들이 일감부족으로 생계가 곤란해지면 알아서 회사를 나가겠지하는 심산에 다름아닌 것이었죠. 이에 노동조합이 재단판 공사진행을 막았습니다. 그래서, 줄이지 않은 조건에서 재단실을 이전하게끔 했습니다.
계속 노조의 반대로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게 된 회사는 노골적으로 탄압을 가해왔습니다. 부분회장이 관리자에게 조합원과 비조합원 간에 일감차별을 하지 말 것을 항의하자, 그 과정에서 상급자에게 폭행했다는 이유를 들어 당일로 계약해지를 해버렸죠. 이건 정말 억지쓰는 것인데, 불만있으면 회사를 나가면 될 것 아니냐며 부분회장의 배를 샤프로 쿡쿡 찌르는 등, 관리자가 인격적으로 모독을 주는 행동을 제지하려고 했던 것을 폭행이라니요. 그리고 그날로 당장 계약해지를 통보하고 부분회장의 일감을 빼고 자리를 정리해버리는 것은 정말 회사측에서 대놓고 노동조합을 탄압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부분회장의 부당한 해고를 기점으로 노동조합은 12월말부터 부당계약해지 철회, 노조탄압 분쇄, 회사의 구조조정 분쇄를 위한 행동을 시작했습니다. 매일 점심마다 회사 앞에서 집회를 진행하고 연대단위들과 함께 집중집회를 진행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자 회사는 일감투입 방식을 바꿔서 노동자들의 목줄을 죄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대기일감을 줄이면 작업과 작업 사이의 시간공백이 많아져 결국 미싱사들의 소득은 급격히 감소되는데요, 하루 9시간을 일해도 두명(미싱사와 견습공, 두명이 한팀)이서 월 100만원 벌기도 힘들어졌어요. 본사 생산량을 급격히 줄일 만큼 정말 경영이 어려운 것인지 회계장부를 공개하라고 요구했으나 회사는 이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본사위주의 생산을 하청위주로 바꿔서 일감을 돌리면서 본사의 노동자들에게는 일이 없으니 나가야겠다고 하는 것은 말이 안되죠. 그리고 이렇게 업무를 줄이고 하청으로 일감을 빼는 것은 객공(개수급노동자)이라는 약점을 이용하는 것이고, 노동자들끼리 일감을 가지고 다툼을 벌이도록 조장하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노조의 힘을 약화시키는 거죠.
이에 보다 강고한 투쟁을 진행하기로 하고서, 2월 18일부터 회사 앞에 천막을 설치하고 주야간 농성을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회사는 천막농성을 시작한 3일 후인 21일, 6명의 미싱사에게 계약해지 통보를 단행했습니다. 그로 인해 견습공(시다) 6명도 거리로 쫓겨나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회사는 당일 있었던 협상자리에서는 일감안정 보장과 최저임금 보장 요구에 합의가 가능할 것처럼 하고서, 돌아서서는 우리들이 소사장이라는 이유를 들어 조합원 중 특수고용직 노동자 12명에게는 계약해지를 통보하고 연봉제 조합원에게는 징계위원회 회부를 경고한 상황입니다.
상황이 좋지는 않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투쟁을 보다 가열차게 진행해나가려고 합니다. 연대단위들을 규합하여 공동대책위원회를 꾸렸고, 현재 3차 결의대회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Q 사측의 태도에 대해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십시오.
A 노동조합과 대화할 자세는 전혀 없고 협박을 일삼고 있지요. 인사위원회에 불려간 조합원에게 진술서를 강요하기도 했는데요. 그 진술서라는 것이 죄다 "당신 **** 했습니까, 안했습니까"라는 질문으로 구성되어 있었어요. 취조심문하는 것에 다름아닌거죠. 그리고 저와 비공식면담을 진행할 때도 녹음기를 들고 왔더라구요. 계속 치사한 방식으로 꼬투리를 잡아 노조를 탄압하려는 것이죠. 또 회사 간부들 같은 경우엔 연봉제 조합원들에게, 객공(개수급노동자)에게 동조하면 불이익을 당할테니 노조를 탈퇴하라고 협박을 일삼기도 합니다.
심지어는 투쟁과정에서 건물 관리 노동자를 용역에서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일도 있었는데, 결국 같은 노동자들을 회유와 협박으로 분할하고 통제하려는 심산인 거죠. 그나마 정규직으로 전환시키면서 임금이라도 올랐으면 모르겠는데, 오히려 임금은 삭감되었다고 해요. 생색만 내면서 궂은 일을 도맡아 시키려는 거죠.
Q 노조원들의 상황은 어떤지 궁금합니다.
A 이 업종의 노동자들은 모두 힘들게 일해왔습니다. 하청공장의 노동자들에 비해 부띠끄 업종 노동자들의 상황은 좀 낫다고 할 수 있지만, 그래도 하루 10시간 일하면서 미싱사는 종일 앉아있고 제자는 종일 서있는 그런 고된 노동이죠. 그리고 계속 해외로 공장이 이전되면서 사양길에 접어드는 산업인지라 전망이 밝지도 않고요. 그래도 20-30년간 한길을 달려왔다는 자부심과 고급 기술로 벌어먹고 산다는 자긍심으로 한눈팔지 않고 열심히 일해왔습니다. 저만해도 76년부터 이 일을 시작해왔거든요. 그런데, 그렇게 살아온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게 되었다니 분노할 수밖에요. 실력과 관계없이 관리자의 성의없는 말 한마디로 짤리게 되다니 말이죠. 기술자로 인정받고 일해온 사람들이 자존심이 상한거죠. 비록 이런 투쟁 처음해보는 것이라 익숙치는 않지만 끝까지 가보자고 모두 뜻을 모으고 있습니다. 조합원 모두 천막농성을 사수하고 연대활동을 진행하는 것으로 일상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탄압이 거세어질수록 내적으로는 단결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Q 이후 계획은 어떤가요?
A 우리들의 요구는 간단합니다. 일감을 안정적으로 보장해 달라는 것, 일감의 보장을 위해 소사장제는 폐지하자는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진행된 노조탄압에 저항하고 부당하게 해고된 조합원들을 원직복직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구요. 계속 싸울 것입니다. 우리와 뜻을 함께 하는 동지들과 공대위도 꾸렸으니 더 힘차게 싸워야지요. 객공도 노조 결성해서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Q 마지막 질문입니다. 분회장을 결심하는 것이 쉽지는 않으셨을텐데 어떻게 결의하게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더불어 바람이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A 작년 7월, 느닷없이 관리자가 누구누구 그만두라고 말하고 나간 뒤로, 앉아서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주위에서는 동료들이 당황하고, 그 중에서는 당장 다른 일자리 구하러 뛰쳐나가는 사람들도 있었죠. 계속 생각을 하던 중에 전태일이라는 이름 석자가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서울의류산업노조를 찾아가게 되었고, 우리도 노조를 결성하자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처음부터 앞에서 있다보니까 자연스럽게 분회장이 되었구요. 앞장서서 싸우는 것이 힘들기는 하지만 동지들을 믿고 열심히 해보려고 합니다. 바람이라면 일단은 언론에 우리의 투쟁이 알려져서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게 되었으면 좋겠네요. 그리고 많은 동지들이 지지를 보내주시면 좋겠고요. 꼭 이겨야죠!
의류업계가 전반적으로 침체된 가운데에서도 여전히 각 백화점의 상위권 브랜드로 꼽히고 있는 안혜영 부띠끄. 그러나 정작 그 옷을 땀흘려 만든 노동자들은 옷한벌 값도 벌지 못한 채 기계와 다름없는 비인간적 대우를 받고 있는 상황에, 함께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고상하고 세련된 이미지 뒤에서 노동자를 억압하고 노조탄압을 일삼는 로라자본의 기만적인 모습을 폭로하는 투쟁, 신자유주의 하에 속속 진행되고 있는 노동의 유연화로 이 땅의 노동자가 얼마나 그/녀들의 권리를 박탈당하고 있는지 알려내는 투쟁, 전민중이 자신이 흘린 땀값을 온전히 되찾아오게끔 하는 투쟁은 노조를 새로 결성하고 끈질긴 싸움을 각오하고 있는 로라 동지들로 인해 보다 힘차게 진행될 것입니다. 아직은 쌀쌀하지만, 봄이 멀지 않았음을 알리는 날씨처럼 우리의 투쟁에도 봄날이 찾아오리란 믿음을 더하면서 천막을 떠나왔습니다. 전태일의 이름 석자가 로라 동지들에게 희망을 안겨주었듯이, 로라 동지들의 싸움이 모든 의류산업노동자들 그리고 투쟁하는 모든 노동자들의 희망으로 성장하길 바라면서... 노동자들이 이 모임에 조직되도록 할 것이다. 처음엔 정보 공유로 시작하지만 차츰 교육과 실천 속에서 이 모임을 확대 강화하면서 노동조합은 발전해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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