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특수고용 투쟁이 입법투쟁으로 집중되며 발생한 오해와 왜곡
특수고용 노동자의 보호 필요성이 사회적으로 제기되기 시작하면서 수차례 각종 실태조사가 진행되었다. 그를 통해 직종별로, 직군별로 노동자들의 실태를 조사하고, 그로부터 무엇을 보호해야 할 것인가를 도출해 내고자 했었다. 그러나 그 많은 실태조사는 결과적으로 정부의 특별법 안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실태조사 결과를 두고 그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있어서 여전히 판단을 어떻게 할 것인지의 문제가 남는데, 그러한 판단은 이미 정치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실태조사는 모두 실태를 밝혀 무엇을 보호해야 할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선정하여 그 보호 방안을 제출하겠다는 것이었지만, 특수고용 노동자성의 문제는 그 이전에 이미 노동자냐 아니냐에 대한 정책적 결정만이 남은 상태였다.
최근 국가인권위원회에서 특수고용 노동자성과 관련한 연구용역 결과 발표가 있었다. 이 연구 결과는 노조법의 전면 적용을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바탕에 있어서 특수고용형태의 문제에 대한 완전한 이해를 바탕으로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는 특수고용 노동자성 문제가 입법 투쟁으로 집중되면서 내외부에서 발생한 여러 오해 혹은 자본에 의한 왜곡의 지점들과 상통해 있다.
- 특수고용을 선택한 자들?
첫째, 특수고용 노동자들이 자발적으로 이 고용형태를 선택했다는 논리가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는 특수고용 노동자들이 ‘노동시간의 자율성’, ‘성과에 따른 고소득’ 등을 이유로 스스로 선택한 고용형태라는 자본의 주장에서 시작되는데, 그에 대하여 정부의 통계에서도 이미 특수고용 노동자가 얼마나 장시간 노동을 하고 있는가는 드러난 바 있다. 고소득이라는 포장은 그 허울이 벗겨진지 오래이다.
2002년 한국노동연구원에서 실시한 노동부 연구용역 자료에 의하더라도 학습지 노동자들의 주당 평균통상근로시간이 67.5시간인데 비하여 연간평균소득이 1,600만 원 가량에 머물고 있다. 즉, 평균 월 130만원 남짓의 소득을 얻기 위해, 하루 10시간 내지 11시간의 장시간 노동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또한 그 노동의 내용에 있어서도 무거운 교재를 들고 가가호호를 방문하여 수업을 진행하고 회비 수금을 하여야 한다. 또 근로기준법 적용에서 배제되므로 산전후 휴가라는 것도 없어 출산시기가 되면 계약을 해지할 수밖에 없는데, 회원 관리가 강제되므로 출산 직전까지도 일을 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많아 유산율이 높다.
레미콘운송차주들의 경우에도 이는 마찬가지인데, 월 300만 원 가량의 소득이 있다고 하더라도 도로교통비, 유가, 감가상각, 사업소득세 등을 제하고 나면 실수입은 반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2001년 경총의 조사를 보더라도 레미콘 운송차주의 월평균 수당이 2,714,539원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실수입은 150만원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인 것이며, 4대 보험, 휴일․휴가, 퇴직금 등의 적용이 전혀 없다는 것을 감안하면 통상의 근로자보다 훨씬 열악한 수준인 것이다. 또한 비수기에는 휴업수당이라는 것도 없으므로 거의 수입이 없는 상태가 되어 생활의 안정이 보장되지 않으며, 그로 인해 성수기에는 더 장시간 노동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자본은 특수고용 노동자들이 스스로 원하는 노동형태라고 강변하고, 특수고용 노동자들에 대한 법적 보호가 필요하다고 논하는 이들조차 여전히 이런 강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특수형태근로종사자가 자신의 의사 내지 선택에 기하여 특수형태근로 종사자의 지위에 합의한 것”이라는 논리를 되풀이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선택이었다는 것은 취업 시 근로자성이 인정되는 근로자의 형태와 특수형태근로 중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졌을 때에야 그나마 근거를 가진 논리가 될 것이며, 또한 현재의 특수고용 노동자들이 사업자로서의 권리를 조금이라도 가졌을 때에야 그나마 주장이 가능한 논리이다.
현재의 특수형태근로 종사자들 가운데에는 사용자의 해고 위협에 의해 강제로 특수고용형태로 전환 사례가 존재하는 점, 또 자본의 비근로자화 정책에 의해 이미 90년대를 전후하여 특수고용 형태 전환이 완료되었고, 이후 노동시장에 진입함에 있어서 기존의 노동자와 특수고용형태 사이의 선택이라는 것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점을 본다면 과연 ‘자발성’이 존재했다고 볼 수 있는가? 특수형태근로 종사자에게 주어졌던 자유, 혹은 자발적 선택의 권리는 사용자의 위협에 의해 강제로 박탈되었거나, 비자발적으로 포기되었고, 또한 이미 완전히 특수고용화가 진행된 직종에 있어서는 직업선택의 자유는 있었으되, 고용형태의 선택에 대한 자유는 존재하지 않았다. 직업선택의 자유를, 나아가 노동관계법 제반의 배제에 대한 합의로까지 해석할 수는 없지 않은가?
- 누구에게 적용할 것인지를 밝혀라?
또 한편에 존재하는 문제는 특수고용 입법 논의가 구체화 되면서 우리가 내외부에서 부딪쳤던 커다란 오해인데, 그것은 바로 법의 적용을 받을 특수고용 노동자가 누구인지를 획정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한 오해는 주체 내부에서는 특수고용 문제는 ‘사업자 등록증’이 강제로 주어져 사장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노동자들만의 문제라는 식으로 왜곡되기도 했었고, 새롭게 투쟁의 주체로 등장해 오는 노동자들을 다른 투쟁으로 분리해 내려고도 했었다.
노사정대표자회의에서 노동부의 ‘간병인과 애니메이터는 특수고용 노동자가 아니다’라는 주장에 특수고용 내부에서 과연 이 두 직종이 특수고용인지 아닌지를 논의하게 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던 것이다. 또 한편에서는 계속해서 특수고용으로 명명하고 특수고용 노동자의 투쟁의 주체를 키워나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특수고용이라고 지칭하는 순간 모든 권리가 사라질 것을 우려하여 특수고용화의 가능성을 애써 부정하며 투쟁의 대오를 분리해 가기도 했었다.
외부의 조력자들은 지금까지 노조로 조직되어 기존의 투쟁의 중심을 이루어온 특수고용 노동자들과 아직 조직되지 않은 그 외 특수고용 노동자들을 구분하여 위장된 자영업자인 특수고용과 ‘진짜’ 특수고용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이분법을 사용하기도 했었다.
이러한 오해들은 각종 실태주의의 바람을 타고, 직종별로 요구하는 내용과 수준을 분리하였고, 유사근로자, 간주근로자 등의 논의가 마치 노동권 보호의 방안인 듯 논의를 왜곡시켰다. 즉, 문제의 시작을 망각한 채 오직 입법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정신이 쏠려, 마치 특별법 주장은 현실적인 것이고, 노동계의 주장은 지나치게 원칙적 주장이고 터무니없이 강경한 입장인 것처럼, 노동법의 체계를 무너뜨리는 이기적인 요구인 것처럼 호도되고 있는 것이다.
2. 노사정 논의만 반복해온 민주노총, 결국 반동적 정부안은 우리 내부에서 끊임없이 빌미를 제공해온 결과이다.
특수고용 노동자성의 문제는 노동권에 관한 자본과 노동의 치열한 힘겨루기의 결정판이다. 모든 노동문제가 그렇지만, 특수고용의 문제는 단 한 번도 노동이 그 힘 관계에서 전체적으로 우위를 차지해 본 적이 없기에 지금까지 계속된 후퇴를 거듭해 왔다. 문제는 특수고용 노동자의 보호를 주장하는 자들이 그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다만 새로운 보호의 대상으로만 생각해 왔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의 투쟁은 자본의 노동권 수탈에 대응하는 투쟁이다. 하기에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공동투쟁은 자본의 노동 분할 전략을 정면으로 타격하는 것이기에 중요하며, 정규직 투쟁과 비정규직 투쟁이 따로 있을 수 없고, 간접고용 노동자의 투쟁과 원청 노동자의 투쟁이 하나의 투쟁이고, 노동자성의 인정 유무와 관계없이 특수고용 노동자의 투쟁에 전체 노동자가 연대해야 한다고 했었다.
그러나 비정규직 문제가 사회화 되고, 노동운동의 주요한 화두로 자리매김 되면서도 노동계 전체가 ‘노동권’의 쟁취를 위한 전체 전선을 형성해 본적이 없다. 그것은 끊임없이 정부와 자본에 의해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대립으로 호도되어 왔고, 실제로 비정규직 문제가 전체 노동에 대한 구조조정의 문제이고, 전체 노동자의 노동권의 문제임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노동운동 내부의 인식상태로 인해 비정규직에 대한 시혜적 방식으로 해법이 풀려진 결과이기도 하다.
물론 그래서 그 해법이 제대로 해법이 된 적도 없었거니와 특수고용 문제에 있어서는 끝까지 ‘특수’한 문제라는 인식으로 일관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한 인식은 끊임없이 특수고용 문제의 해결을 당사자들에게 되돌렸고, 그 방식은 당사자들을 계속해서 정부와의 협의 틀로 몰아넣는 것이었다.
2002년부터 시작되어 온 노사정 논의 속에서 특수고용 노동자에 대한 대책은 계속해서 후퇴해 왔고, 그 과정에서 특수고용 주체들은 더 이상 그 논의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없음을 명확히 인식하고 노동자성 쟁취를 위한 공동 투쟁을 준비해 왔었다. 2002년 10월 특수고용 노동자 한마당에서부터 시작된 특수고용 노동자들의 공동투쟁은 지난 해 두 차례의 전국 순회 공동 투쟁으로 이어지며, 노동자성 쟁취가 투쟁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음을 명확히 하고 최후의 입법 투쟁 한판을 위한 칼을 벼리고 있었다. 주체의 대오는 미약하지만 투쟁의 필요성이 너무도 명확하였기에 누구도 그 투쟁을 피해갈 수 있다고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단 한 번도 특수고용 노동자의 투쟁을 전체의 투쟁으로 제대로 받아 안지 못한 민주노총은 계속해서 정부와의 논의 틀을 만드는 것으로 투쟁의 기운을 죽여 왔다. 작년 하반기 다시 노사정대표자회의에 들어가며 특수고용 당사자들을 그 논의에 잠식되게 하였고, 그 논의 이후에 나온 것이 10월 25일 경제법 적용 안이었다. 그리고 올해 상반기 2월, 4월, 계속 전면 투쟁의 기회를 잡기 위해 논의를 해오던 당사자들을 민주노총은 또다시 노동부와 특수고용T/F팀을 꾸려 그 안에 몰아넣고자 하였다.
특수고용 노동자의 보호방안에 대하여는 이미 입법자의 정책적 판단만이 남은 상태에서 수년 동안 그렇게 미루어졌고, 그 수년은 노동자가 아닌 것으로 결론을 내리고자 하는 정부의 의도를 관철하기 위해 합의의 외피를 만드는 기간으로 작용하였다.
3. 다시 우리 주장의 역사적 정당성을 상기하자.
지금까지 우리가, 노동계가 주장해왔던 특수고용 노동자의 노동권 보호의 핵심은 비현실적인 것도, 이기적인 것도 아니다. 지나치게 원칙적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그것이 왜 ‘원칙’일 수밖에 없는지를 과연 알고는 있는가?
지금까지 ‘근로기준법 및 노조법의 노동자 개념 확장’이라는 것으로 표현된 우리 요구의 핵심을 다시금 되새기자면,
- 역사적으로 노동법이 비탄력적으로 ‘노동자’라는 특정 집단을 획일적으로 정하고 그 특정집단에 대해서만 보호를 베풀어온 것이 아니라, 산업사회 초기 아동노동의 보호를 위해 노동법이 만들어진 이후 사회의 변화에 따라 노동법은 필요에 따라 보호의 범위를 확장해 왔고,
- 산업의 변화에 의해, 또한 사용자의 다양한 비근로자화 시도에 의해 노동법의 보호 영역에서 배제되는 노동자군이 늘어나고 있는 현실에서, 노동법적 보호를 누구에게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그리고 노동법이 지우고 있는 사용자 책임을 누구에게 어떻게 부여할 것인가에 있어서 노동법의 적용을 받는 ‘노동자’의 범위를 현실에 맞게 재구성해야 할 필요가 있으며,
- 따라서 현재 조직화 및 투쟁을 통해 드러난 몇몇 직종의 문제가 아니라, 그러한 현실 속에서 특수고용 노동자에 대한 노동자성 인정 및 노동법 적용 또한 논의되어야 하고,
- 나아가 특수고용 노동자들의 경우 다양한 노동조건 하에 놓여있기 때문에, 형식적인 측면에서는 사용자에게의 종속성이 강하게 드러나기도 하고, 좀 더 약화된 모습으로 드러나기도 하는 한편, 특수고용 노동자들은 종전과는 다른 측면에서 자본에 대한 종속성을 더욱 강하게 드러내고 있으므로, 이러한 종속의 지점들을 간파하지 못한 채 상시적으로 사업장 내에서 업무에 관한 지시감독을 받으며 근로하는 자만을 ‘사용종속관계’에 놓여있는 ‘노동자’로 판단한다면 이의 범위는 점점 더 축소될 수밖에 없을 것이며, 종속되어 있으면서도 노동자가 아니라고 권리를 박탈당하는 열악한 계층을 계속해서 만들어 낼 것이기 때문에,
- 기본적으로 노동자 개념의 확장 -즉, 노동자 여부를 판단하는 ‘사용종속’ 개념의 확장-을 통한 노동자로서의 인정과 함께 노동자에게 적용되는 가장 기본적인 법인 근로기준법과 노동조합법의 적용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다만 조직된 몇몇 직종에게, 현재 특수고용 형태로 드러난 몇몇 업종 노동자들에게 노동법을 적용하자는 요구가 아니었다. 현재 조직된 특수고용 노동자뿐만 아니라, 무수히 많은 노동자들이 자본의 전략에 의해 얼마든지 특수고용화 될 수 있으며, 이미 그러한 시도는 진행되고 있다.
‘특수고용화’라는 이름을 비껴가면서 특수고용도 아닌, 그러나 특수고용과 다를 바 없는 노동자들이 정부의 정책 속에서 양산되고 있다.
자활이라는 명목으로, 사회적 일자리라는 이름으로, 가사사용인, 비공식 노동이라는 미명 하에 노동권을 박탈당하고 있는 노동자들이 있고, 그들에 대해 우리의 내부가 가졌던, 그리고 외부에서 형성된 오해들은 그들을 또 다른 영역으로 밀어내 특수고용 투쟁의 폭을 좁힐 뿐 아니라 기득권적인 투쟁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지금 현재 시점에서 각 직종을 분할하며 정부의 법안이 구상되고 있는 것이다.
4. 투쟁을 조직하자. 그리고 투쟁을 확장하자. 진정 살아남기 위해서다.
수년을 투쟁해 왔으나, 마지막 한 라운드를 남기고 주체의 상태는 최후의 한판을 제대로 치러낼 지 알 수 없는 상태이다. 정부는 끝내 노동자성을 부정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고, 현재 국회의원들의 입법안이 발의되어 있으나, 국회에서 어떻게 다루어질 지는 미지수이다.
정부는 특수고용 노동자들에게 마지막 남은 ‘노동자’의 이름을 빼앗기 위한 최종 작업에 돌입했고, 그것이 최근까지 진행하고자 했던 T/F팀이다. 그 구성이 경총의 참여 거부로 사실상 무산되면서 정부법안이 제출되지 않고 있다. 또 그것을 가지고 내부에서는 정부가 안을 제출하지 않으면 현재 국회에 제출된 의원 입법안도 논의될 수 없다는 식으로 특수고용 노동자들을 압박해 오고 있다.
투쟁하지 않고자 하는 자들의 거짓 협박이고, 어떻게든 정부와 파트너쉽을 형성하고자 하는 자들의 더러운 협박이다.
어떤 논의가 진행되든 그 과정은 단지 정부의 입법안을 내기 위한 합의의 과정으로 활용될 뿐이다. 현 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부의 입을 다물게 하고, 투쟁으로 국회의 논의를 밀어붙이는 것이다. 지금까지 입법 투쟁에 많은 것을 투여했고, 노동자성이 인정되는 방향으로 입법이 된다면 더없이 좋은 결과가 될 것이다. 또 그런 결과를 만들어 내기 위해 모든 것을 다해 투쟁해야 한다.
지난 5년, 6년을 넘어온 기나긴 투쟁, 그 마지막 한 번의 승부를 남겨둔 시점에서 특수고용 투쟁은 이제 전환점을 맞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하자면 특수고용 투쟁은 지금에서야 제대로 노동권 쟁취 투쟁으로 서게 될 계기를 맞이했다고 본다. 그나마 지켜야 할 노동조합이 있다고 생각하는 상태에서는 도저히 넘어설 수 없었던 그 한계를 이제 주체들은 뛰어넘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이후 수년간을 바라보는 투쟁의 전략이 필요하다.
이제 특수고용 투쟁은 새롭게 주체들을 세워내고, 지금까지처럼 새로운 투쟁의 주체를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투쟁의 주체를 확장시켜 가며 투쟁을 확산시켜야 한다. 노동권을 박탈당하고 있는 모든 노동자들을 결집시켜 내야 한다. 지금까지 조직된 특수고용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노동조합을 지키기 위해 투쟁해 왔다면, 이제는 빼앗긴 노동권을 되찾기 위한 투쟁을 제대로 조직해야 한다. 내부에서부터 외부로 확장하며 조직해 나가야 한다.
입법의 시기와 내용은 우리 투쟁에 달려있다. 그리고 어떻게 입법이 된다 하더라도 특수고용 투쟁의 다만 한시기가 마감되는 것일 뿐이다. 이 한 시기를 잘 마감하기 위해 최선의 투쟁을 배치하고 최후까지 투쟁을 조직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끝이라고는 결코 생각할 수 없다. 그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다음에 무엇을 준비해 가야 할 것인지, 어떤 투쟁을 배치해야 할 것인지 지금부터 고민해야 한다. 다시 현장에서 두 동강이 된 노동자를 혹은 노동자가 아니게 된 노동자를 어떻게 조직해 낼 것인지 계획을 제출해야 하고, 이후에 투쟁의 대오를 어떻게 확장해 갈 것인지, 자본에 의해 침탈되는 노동권을 복구하기 위해 전체 전선을 어떻게 형성해 가야 할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비록 특수고용 입법이 반동적으로 마감되더라도, 가장 먼저, 자본의 노동권 침탈 시도에 맞선 투쟁의 시작은 특수고용 입법의 결과에 불복하는 것에서 시작하여야 한다. 그로부터 다시금 현장에 노동권 쟁취 투쟁을 만들기 위해 악법을 어기는 투쟁을 조직하는 것에서부터 만들어야 한다. 모든 것은 그때 다시 시작이다. 그 시작을 위해, 지금 우리는 투쟁해야 한다. 설령 가진 것 모두를 잃게 되더라도 진정 제대로 살아남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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