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맥 끝에 매달린 붉은 꽃잎이
질끈 감은 눈에서 방울 되어 떨어진다
흐릿하게 번진 빨간 꽃잎이
새하얀 추위에 산산이 흩어지고
핏줄을 돌던 동지들이
내게서 모두 빠져나가면 나는 죽을 것이다
더러운 돈으로 쌓아올린 검은 성안에서
손배가압류 화살이 하늘을 뒤덮고
심장을 뚫고 들어온 화살에
나는 쓰러지는 구나
동지들이여 멈추지 말라
나를 밟고서
검은 성안에 노동자의 깃발을 꽂으라!
-성진애드컴노동조합 이진훈, 나를 밟고서 꼭 승리하여라 - 한원cc노조에 드리는 글 中-
지난 3월초, 우리는 한원CC 원춘희 동지의 자살기도라는 참담한 소식을 들어야만 했다. "나를 밟고서 꼭 승리하라"는 말을 남기고 왼쪽 손목의 동맥을 끊어냈던 원춘희 동지였지만, 그러나 다행히도 건강을 되찾고 3월 말부터는 한원CC 노조가 천막농성을 진행하고 있는 양재동 본사 앞에서 모습을 뵐 수 있었다.
노동법 개악저지투쟁 기획단의 투쟁사업장 연대문화제가 열리던 3월31일, 한원CC 농성장에서 원춘희 동지를 만나 뵙고 이야기를 나누어보았다.
경기도 오산에서 어머니와 함께 생활하고 계신 원춘희 동지는 한원CC에서 일한지 13년이 되신다고 합니다. 올해로 37살을 맞았으니, 청춘을 한원CC와 함께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경기보조원 일을 시작하게 되셨는지, 그리고 '캐디'라고 불리우는 경기보조원 일은 어떠한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캐디일은 그만큼의 전문성이 있으니까 보람을 가지고 해왔어요"
오산 쪽에서는 골프장이 상당히 많다. 골프장에 들어가면 돈을 많이번다라는 이야기가 있었고, 그래서 돈벌러 들어갔다 ^^; 그런데 일이 고된만큼의 보수를 받지 못하는게 캐디일이다. 게다가 비수기에는 일이 없다. 한여름엔 일 못하고, 뜨겁고 비오고 눈오면 손님이 없어서 일이 적고 그렇다.
그렇지만 캐디일은 그만큼의 전문성이 있어서 보람은 있다. 전문성이랑 거리가 먼 일로 여겨지지만, 사실 캐디일은 단순한 서비스직이 아니라 전문직이다. 골프의 룰을 모두 이해한 가운데 손님들에게 적절한 어드바이스를 해주어야 하고, 손님의 성격이나 수준같은 것도 잘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날씨, 바람의 방향, 코스의 지형 등을 모두 고려할 수 있어야 하는데, 골프장이 모두 똑같은 모양이 아니기때문에, 지형과 거리 모양 등을 다 궤뚫고 있어야한다. 상당한 전문성을 요하는 것이다. 흔히들 생각하듯, 손님 가방메고 쫓아가면 되는 일, 볼 날라가면 주워오면 되는 일이 절대 아니다.
경기를 마치고 "덕분에 즐거운 라운딩이 되었다"는 말을 들을 때 뿌듯함을 느낀다. 나의 전문성이 인정되고, 손님에게 즐거운 플레이가 되도록했다는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직업이다.
"잔디에게 물 줄 돈은 있어도 우리에겐 물을 주기 아깝다는 거였죠"
한동안 이런 적이 있었다. 라운딩을 끝내면 땀범벅이되는데, 한여름에 물이 안나와서 씻을 수가 없었다. 점심때 한시간동안만 물이 나왔는데 그때 몰아서 씻으라는 거였다. 결국 잔디에게는 물 줄 돈이 있어도 우리들한테는 물쓰기 아깝다는 거였다.
부당한 처우는 이야기하자면 한두가지가 아니다. 퇴직금 보너스 일체없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심지어 경기보조원에겐 안경도 못쓰게 한다. 안경쓰면 인상이 안좋다는 이유다. 안경도 못쓰고 강한 태양빛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코스를 도는 생활을 반복하다보면 각막염같은 안구질환에 걸리기 쉽상이다.
"일하다 다쳐도 자기돈들여 치료해야하는게 우리같은 특수고용 노동자 신세예요"
공에 맞는 사고가 제일 많다. 볼이 제대로 맞으면, 두꺼운 전화번호부 책도 뚫고 나갈 정도의 위력을 가진다. 그렇게 위험한 타구사고가 언제 발생할지 모른다. 그리고 막상 다쳐도 내돈들여 치료를 할 수밖에 없다. 그게 바로 특수고용노동자의 신세인 거다! 정규직이라면 산재처리가 되지만 특수고용노동자들은 해당사항없다. 아파서 일을 못하면 일 못하는 동안 돈을 못버니까, 다쳐도 치료할 엄두를 못내게된다.
"캐디가 얼굴로 하는 일도 아닌데, 24살만 되어도 노땅취급하죠"
아무래도 전문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보조하는 여자정도로 여기니, 성희롱이 존재한다. 만약 우리가 용역으로 넘어가면 그런문제가 더 커질 것이다. 그래도 지금은 사측에서 임의로 지정하는 내장객과 경기를 하는데, 용역이 되면 내장객의 취향에 따라 지정제가 될 가능성이 있다. 그렇게되면 지금보다 더 외모와 나이를 따지게 될 것이다. 캐디가 얼굴로 하는 일도 아닌데, 24살만 되면 노땅취급받는다. 정년퇴직도 정규직보다 빠르다.
특수고용노동자라는 이름으로, 여성노동자라는 이름으로, 온갖 차별과 부당함, 각종 성차별과 성희롱에 시달려야 했던 현실이 안타깝기만 했습니다. 이런 상황을 개선하기는커녕, 경기보조원들을 용역화하겠다는 사측의 처사에는 분노가 치밀어오를 뿐입니다. 원춘희 동지에게 투쟁을 시작하기까지의 과정과 현재의 상황에 대해 물었습니다.
"특수고용직인 지금도 파리목숨인데, 용역이 되면 하루살이 목숨만도 못하게 되는 거죠"
한원CC 노조는 2002년에 설립되었다. 건설당시부터 조합원은 아니었는데, 용역전환만큼은 막아야 겠다는 생각이 있었다.
특수고용직이라는 이름을 달고 일 할때도 우리는 파리목숨이었다. 회사가 작정만하면 아무소리 못하고 짤리는 파리목숨이었다. 그런데 용역으로 전환되면 이건 파리목숨도 아니고 하루살이 목숨만도 못하는 신세가 되는 거 아니겠는가.
용역은 막아야겠는데 그렇다고 조합원되는게 쉬운 것은 아니었다. "노동조합 사무실 문고리만 잡아봐라, 해고하겠다" 이런 식으로 사측에서 협박을 하는데 조합을 선뜻 가입할 엄두가 안났다. 그러나 우리 조합원들이 너무 힘들게 싸우는 과정을 보면서, 도저히 안되겠다, 나라도 가서 힘을 보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조합가입하고 투쟁에 동참했다.
"7월 23일, 새벽에 용역깡패가 들이닥친 이후부터였다. 서러움과 분노로 싸우게 되었다."
12년동안 트러블없이 회사생활을 잘한 편이다. 지금 용역 사장이 이전에 마스터였는데, 같이 라운딩도 하고 동료로서 잘 지냈다. 그런데 조합가입이후, 노조원이라는 이유하나로 사측에서 태도가 싹 바뀌는 모습을 보면서 억울했다.
사실 조합원되고서도 구호를 외치기가 쉽진 않았다. 나랑 친분이 있던 사람을 두고 사퇴하라, 각성하라, 외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정말 이건 아니다'라고 느꼈던 것은 작년 7월23일 용역깡패가 투입된 때부터였다.
농성장소에서 모기장을 치고 자고 있었는데 새벽에 용역깡패들이 들이닥쳤다. 동지들이 막 쓰러지고 나도 맞아서 넘어졌다. 우리는 사람이 넘어지면 옆으로 피해서 넘어가지 않는가. 그런데 용역깡패들은 그냥 밟고 지나가더라. 사람이 바닥에 넘어져있다는 것을 안중에 두지도 않는다. 맞고 쓰러져서 가슴이 짓밟혀도, 비조합원 동료들은 그 모습을 멀리서 그냥 쳐다보고만 있더라. 뭐하는 짓이냐고 소리라도 쳐주면 모르겠는데, 팔짱끼고 쳐다보다가 아무렇지않게 일을 하러 나가더라. 너무 서럽고... 그땐 서러웠다. 아무리 친했었던 사람도 그땐 미웠다. 나도 인간이다보니까 밉더라. 그러면서 해고라는 것이 이렇게 무서운 거구나, 조합이라는 것이 이렇게 탄압을 받고 힘든 거구나, 그때부터 구호를 외치게 되었다. 서러움과 분노를 그때부터 느끼고 싸움을 하게 되었다.
"당시의 수치심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밑을 쑤셔버리겠다, 애를 죽여버리겠다, 용역깡패들이 욕을할 때 그 수치심을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어머니뻘 되는 조합원들에게 욕은 기본이고, 남편과 사별한 조합원에게 '니가 그러니까 남편잡아먹고 혼자사는 것'이라고 막말을 하더라.
대표이사라는 사람이 조합원들에게 Fuck you라고 욕을하는 손짓(가운데 손가락을 치켜세우는)을 하고 지나가는 일도 있었다. 해도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을 한다.
"나를 밟고 한원이 승리만 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이라는 심정이었다"
투쟁이 길어지면서 많이 힘들었다. 그러다가 집이 가압류 걸린 사실이 어머니에게 알려질 상황이 닥쳤다. 있는 것은 고작 집한채인데, 그것마저 빼앗긴다면 몸이 안좋으신 엄마가 쓰러질 판이었다. 나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어차피 물러설 곳이 없을 바엔 나를 밟고서라도 한원이 승리하도록 하고 싶었다.
"내가 한 일이 쇼래요. 사측에서는.
다시 기운을 차려야겠다고, 다시 싸워야겠다고, 밥을 먹기 시작했죠"
밥을 먹는 것이 수치스러웠다. 죽겠다고 그랬는데 살겠다고 밥을 목구멍으로 넘길 수가 없었다. 내가 죽지 않아서 목적한만큼 투쟁의 효과가 안나면 어떻게하나 우울증 증세도 생겼다..
그러다가 밥을 먹고 기운을 차려서 투쟁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은, 사측에서 나의 자살기도를 '쇼'라고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서였다. 내가 이대로 죽어도 쟤네들에겐 '쇼'이겠구나, 차라리 살아서 강력하게 싸워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아직 병원에 치료를 받으러 다녀야해서 출퇴근을 하면서 천막농성에 결합하고 있는 중이다.
우리는 막판이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고, 투쟁뿐이다.
투쟁의 의지를 불태우며 원기를 회복하고 계신 원춘희 동지를 보며, 이 싸움은 승리할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원춘희 동지에게 원직복직이 되면 가장 먼저 하고 싶은일이 무어냐고 물었습니다.
"일하고 싶어요.
잔디밟고 싶어요
푸른 잔디를 그렇게 밟고 싶네요. 정말 일하고 싶네요."
한원에서만 13년, 캐디일은 16년째 해왔다는 원춘희 동지. 그녀의 마지막 대답에서 담뿍 묻어나는 경기보조원 일에 대한 애착과 자부심은 듣는이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뜨거운 가슴을 가지고 투쟁을 하는 동지들이 있는한, 한원CC의 투쟁은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 다음의 투쟁현장에서 만나길 약속하며 원춘희 동지와의 인터뷰를 마쳤다. 한원CC의 투쟁이 모든 경기보조원들 그리고 특수고용노동자들과 여성노동자들에게 희망이 되길 바란다. 그 길에 불안정노동철폐연대도 언제나 함께 할 것이다.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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